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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코로나 시대, 상상의 여행 계획을 짜보자

입력 2021.05.21 13:34

수정 2021.05.2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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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지연 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여행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고야의 그림이 있는 프라도미술관을 보고 싶었다. 지난해 1월 처음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갔다. 고야, 벨라스케스, 보쉬 등의 작품을 실컷 봤다.

여행의 기억에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 찼던 공항, 마드리드 시내에서 만났던 낯선 나무들, 타파스나 파에야 같은 독특한 음식들, 쾌활하기 이를 데 없는 외국인 관광객들. 일상이 아닌 것들은 무엇이든 설렜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때가 곧 돌아오면, 사람들은 다시 자기들만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지난 설 연휴를 앞둔 2021년 2월 23일, 마스크를 쓴 여행객들이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출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코로나19가 끝나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때가 곧 돌아오면, 사람들은 다시 자기들만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지난 설 연휴를 앞둔 2021년 2월 23일, 마스크를 쓴 여행객들이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출국장으로 향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에 코로나19가 퍼졌다. 명랑했던 거리의 스페인 사람들이 걱정스러웠다. 곧 우리나라도 코로나19가 심각해졌다. 팬데믹이 2년째 접어든 현재, 해외여행이 돈과 시간의 문제였던 때와는 다른 세상이 됐다.

못 가니까 여행이 무척 가고 싶다. 낯선 도시의 거리를 한가롭게 걷고 싶다. 다시 못 볼 사람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싶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독일 역사학자 빈프리트 뢰쉬부르크의 <여행의 역사>(1997)다.

뢰쉬부르크는 여행의 문화사를 전달한다. 여행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사람들은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것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초창기 여행에는 전설과 역사가 섞여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 이야기였다. 길가메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망자의 섬에 사는 우트나피슈팀을 찾아 떠났다.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 헤매는 것은 인류의 시작부터 우리 인간의 본성이었다.

못 가니까 무척 가고 싶다, 여행

가장 놀라웠던 건 2000년 전 고대 로마제국의 여행이다. 거대한 제국 안에서 근대처럼 쉽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20만㎞에 달하는 놀라운 도로망을 건설했다. 도로는 북해에서 사하라까지, 대서양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이어졌다. 놀랍게도 로마인들은 국립우체국 중계역참에서 여행안내서와 시간표로 여행 경로를 짰다.

로마제국이 몰락하자 도로망은 쇠락했다. 중세에는 순례와 선교 여행이 나타났다. 1477년 출간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흥미진진한 여행기였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에 터키, 이라크,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중국에 도착했고, 쿠빌라이 칸의 측근이 됐다. 그의 경이로운 여행담은 서양인들의 세계 탐험에 결정적 자극제가 됐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행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일 거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찾아 서쪽으로 항해하다 예기찮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 이 여행은 이후 유럽인들이 전 세계로 달려나가는 기폭제가 됐다. 이미 원주민이 있는 땅이 신세계로 불린 게 어이없지만 말이다.

이후 지리학자와 의사들이 학술 여행을 떠났다. 인문주의자들은 사상적 교류를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나는 세계시민이고자 한다. 세계 곳곳이 나의 고향이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말이다.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쌓으려는 욕구가 여행을 통해 분출했다.

‘그랑 투르(grand tour)’는 17세기 신사들의 여행이다. 여행은 교육의 일부였고, 귀족의 즐거운 행사였다. 18세기 말 계몽주의는 여행에 새로운 자극을 선사했다. ‘알려는 용기를 가져라’ 같은 계몽주의의 모토는 여행과 잘 맞는 짝이었다. 그 결과 시민적 계몽의 중심지를 찾는 여행이 이뤄졌다. 산업혁명의 나라인 영국으로, 계몽주의의 성지인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효형출판

효형출판

18세기 말 이후 영국인들은 점점 더 큰 무리를 지어 여행했다. 영국의 폐쇄적 위치와 그랑 투르의 전통이 그 요인이었다. 여기에 무미건조한 일상에서의 탈출과 금전적 여유, 새로운 경제적 꿈이 또 다른 요인을 이뤘다. 당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은 낭만주의였다. 자연을 느끼고 고딕을 재발견하려는 열정이었다.

이 영국인들의 여행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여행의 기원을 보여준다. 당시 독일 라인강 지역에선 가족을 동반한 영국 여행자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대중 관광은 이렇게 시작됐다. 또, 18세기 중엽 영국 브라이튼 해변에 세계 최초의 해수욕장이 생겼다.

계획부터 여행의 시작이다

19세기 철도는 조직적 관광으로서의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줄어든 교통비는 ‘여행의 민주화’를 열었다. ‘관광 여행’이란 말이 1800년 영국에서 처음 사용됐고, ‘관광객’이란 단어도 일반화됐다. 영국의 토마스 쿡은 1841년 철도를 통한 최초의 단체여행을 기획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선 노동자들이 유급 휴가를 갈 수 있게 됐다. 이제 폭넓은 계층이 휴가와 관광을 누리게 됐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여행은 한층 자유로워졌고, 비행기는 여행의 공간을 크게 확장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행했던 시대는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행은 상품화의 단계를 밟아왔지만,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았다.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여행을 떠났다. 코로나19가 끝나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때가 곧 돌아오면, 사람들은 다시 자기들만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상상의 여행 계획을 짜본다. 어디를 갈까. 여기에는 무엇을 충전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만나 굳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게 중요할 수 있고, 일상을 떠나 느긋한 휴식을 취하는 게 중요할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을 정했다면 인터넷 항해를 시작한다. 거기에는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가 잔뜩 있다. 저렴하고 신경 쓸 게 적은 패키지여행으로 할지, 돈이 좀 더 들더라도 자유로운 개별 여행을 할지를 고민한다.

여행을 같이 간다면 누구와 갈까. 지금 가장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누구일까. 서로에게 괜찮은 동행이 될 수 있을까. 계획부터 여행의 시작이다. 여행이 꼭 생각한 대로 진행되리란 보장은 없다. 기대를 품고 떠났지만 실망스러웠던 여행도 있었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즐거웠던 여행도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십이 넘으면 삶이 빤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20대나 50대나 미래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다른 장소, 다른 사람, 다른 삶을 보고 겪으며 살아가고 싶다. 삶이란 어차피 긴 여행이지 않던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의 한 구절이다. 미래의 여행에서 부디 최고의 날들을 만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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