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로를 따라 안산에 기대어 이어진 동네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3호선 독립문역 사이, 서울역에서 무악재를 잇는 의주로를 따라 길게 펼쳐진 동네가 천연동이다. 예전의 냉천동, 옥천동, 영천동, 현저동 등이 천연동으로 묶여 있다. 북쪽으로 독립문이 있고, 동네가 기대 있는 안산을 뚫고 이대와 연대로 이어진다. 그 길은 동쪽으로 광화문이 연결되니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동쪽으로 길 건너편은 천지가 개벽해 싹 밀고 말끔한 아파트촌이 들어섰다. 독립문과 마주 선 영천시장 부근도 지금 한창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천연동은 독립문 인근 현저동 냉천동 등이 합친 동네이다.
천연동이란 이름은 무악재로 향하는 길목에 천연정이란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천연정은 의주로 길가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푯말로만 남았다. 그 곁에 과거 이곳에 경기도 군사를 지휘하던 중군 군영이 있었다는 표석도 함께 있다. 땅과 이름에 묻힌 대부분의 자취는 잊히고 만다. 다만 문학 속 동네와 생활의 자취들은 어느 시점에 박제돼 이어지게 되는데, 현저동과 독립문 그리고 천연동과 안산 일대의 풍경들은 박완서의 소설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누구라도 안산 주변에서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그의 소설을 들여다보면 된다.
무악재 길목에 있던 정자 ‘천연정’
서울 어디라도 변하지 않은 곳이 없건만 천연동 일대는 용케 그 속도가 더디고 늦게 변했다. 박완서가 살던 광복과 한국전쟁 무렵의 모습이야 볼 수 없다 해도 골목엔 일제강점기쯤 지었을 기와집도, 그 무렵의 벽돌집도 남아 있다. 독립문 건너 서대문형무소는 과거 모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으니 이 부근을 걷는 걸음은 조금 느려도 괜찮을 듯싶다.
길 건너편은 아파트단지가 됐다.
서대문역 쪽으로 붙은 골목길은 과거와 현실이 공존한다. 인근에 부쩍 많이 들어선 사무실 건물 덕분인 듯 젊은 취향의 식당과 주점이 골목을 꽉 채웠다. 역에서 골목으로 향하는 어귀엔 크게 맛집 골목이라는 간판도 세워두었다. 대부분은 평범한 취향의 식당 일색이고 간혹 아주 오래된 한식 전문 식당이 눈에 띈다.
김치찜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은 수십년 장사하던 터를 옮겼다. 아주 커다랗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옮겨야 했다고 적어 두었는데, 그 사정이 무얼까 알 것도 같다. 여태 보지 못한 질병이 창궐하고 손님이 줄어도 이제껏 집세를 내렸다는 이야기는 온갖 미담으로 치장해 산 넘어 소식으로 전해질 뿐 내가 사는 옆집 앞집에선 보지 못했다.
이 골목에도 문을 닫은 가게가 눈에 띄고 임대 표지를 붙인 곳도 간혹 볼 수 있다. 다 같이 겪는 어려움도 유독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저녁장사 준비를 하다 잠시 골목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문 가게 주인의 표정도 밝지 않다. 행인들마저 마스크 쓴 표정 위로 불안과 두려움이 스쳐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골목 안 유명한 맛집들도 보인다.
천연동은 독립문까지 안산에 기대어 길게 이어진 동네이다. 중간중간 감리교 신학대학교와 동명여중, 금화초등학교 등이 있고 제법 큰 교회와 성당도 박혀 있다. 의주로를 끼고 있는 쪽은 길고 긴 옛날 골목이 이어지고 안산에 바짝 붙은 곳엔 아파트들이 아랫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밑 마을은 대부분 1970년대에 지어진 굵직굵직한 연립주택이 보이고, 골목은 한때 유행하던 다가구 주택들이 점령하고 있다.
신기한 것이 골목 어디에서도 온갖 새소리가 들렸다. 새들은 눈에 잘 띄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서 서로를 부르고 영역을 주장하며 제 목소리로 외쳐댔다. 오래된 연립주택엔 지낸 세월에 어울릴 만큼 굵직한 나무들이 서 있고, 담 한편으로 장독대도 볼 수 있다.
오래된 마을답게 골목 안 옛집도 보인다.
안산 아래 아파트를 향하는 마을버스가 올라오는 길목엔 고목 아래 전을 펼친 길바닥 잡곡상도 눈에 띈다. 흰콩에 서리태, 녹두와 팥이며 차조에 메조까지. 얼핏 봐도 30종은 돼 보이는 제법 큰 노점이다. 손주와 걷던 장년의 여인이 양산을 걷고 물었다. “기장은 얼마야?”, “이건 2000원, 저건 3000원. 비싼 게 더 좋아.” 여인은 순순히 3000원짜리 두되를 산다. 손주는 거래가 오가는 중 신기한 듯 온갖 곡식들을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있었다. 할머니나 장사꾼이나 그 장난을 멀뚱히 지켜만 보고 있다.
산밑 마을 골목골목엔 온갖 새소리
골목은 대부분 옛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100년도 더 돼 보이는 기와집 대문의 ‘입춘대길 건양다경’ 글씨를 만나거나, 넓게 터를 잡고 손으로 쓴 양철 간판을 이고 있는 자동차 정비소와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게 된다. 오래된 목욕탕 건물은 온천 표시를 지우고 독서실로 둔갑했다. 마을버스 정류소 앞 통닭집은 닭을 펄펄 튀겨내고 있었다. 좁은 골목 복판에 길고양이 한마리가 버티고 앉아 비키질 않자 초등학생 둘은 순둥이처럼 지켜보고만 있었다. 영어의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골목 안 학원은 문을 닫았다. 골목은 평온했다.
영천시장은 번창하고 있다.
선을 쭉쭉 긋는 강남식 도시계획과 무관하게 살아남은 골목들이라 어느 곳은 좁고 낡았다. 상업지역을 살짝 비켜 들어가면 꽁꽁 잠근 대문 밖으로 나름 신경 쓴 화분들이 골목 샛바람에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인상을 쓰고 마지막 담배 한모금 내뱉은 노파는 사납게 입을 열었다. 함께 화분을 들여다보던 나에게 그는 “어떤 놈이 꽃만 똑똑 따갔다. 대가리 꺾일 때 꽃들이 얼마나 아팠겠나. 사람이건 꽃이건 남의 사정 알 바 없이 제 욕심만 차리려는 작자들은 언젠가 뜨거운 맛을 보게 돼 있다”고 했다. 비록 그 꽃을 꺾지는 않았지만, 이제껏 살아오며 몰염치하게 저지른 일들이 떠올라 속이 매웠다.
교회 주차장 옆 담벼락에 소녀 둘이 소꿉 살림을 차렸다. 집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소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뜸 사나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거기 주차하지 말랬잖아!” 우리는 모두 때에 따라 부드럽고 상대를 골라 억세진다.
비좁은 골목 안엔 도가니탕과 냉면을 파는 식당도 있었다. 조금 위엔 현대식으로 잘 꾸민 수제 맥주 양조장과 시음장도 있다. 술맛과 분위기로 제법 유명한 곳이라는데 어째 이런 골목 속 깊숙이 숨어 있을까 싶다. 청국장과 가정식 백반으로 유명하다는 식당도 있었는데, 주인장은 무엇을 하는지 문을 걸어 잠갔다. 일부러 찾아왔다는 부부는 문을 흔들다가 응답이 없자 “인왕산 등산 갔다가 모처럼 들렀는데 문이 잠겼다”며 무작정 기다리겠단다.
영천시장 주변이 재개발되면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선다.
천연동의 중심은 영천시장이다. 금화초등학교를 막 지나면 독립문 방향으로 살짝 어긋난 긴 골목길이 영천시장이다. 시장은 지금도 활기차다. 아주 오래전에는 경기도 고양에서도 장을 보러왔다는 전설이 있다. 전통시장이지만 젊은 손님도 많았고, 무엇보다 근처 중학교의 소녀들이 어느 가게에 무엇을 먹으러 갈까를 열띠게 토론하고 있다. 큰길 건너 오래된 동네가 온통 아파트단지로 변한 후, 아파트 주민들도 길을 건너와 영천시장을 본다.
시장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게 떡집인데, 떡장수 30년째라는 주인은 “안산 넘어 봉원사가 있고, 그 주변 집들이 모두 작은 암자들이다. 다 단골 떡집과 연결돼 떡을 맞춰간다. 그러니 떡집이 많을 수밖에. 지금은 재도 줄고 떡집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살길 찾아 젊은 층이 좋아할 알록달록한 메뉴를 개발한 떡집도 보인다. 포장도 세련되게 바꾸고 젊은 입맛으로 갈아탄 것이다. 어떤 떡집 주인은 “채소장사를 하다가 떡집 잘된다 해서 인수한 지 1년 됐다. 그냥 망했다”고 푸념했다. 오후가 되자 떡집들은 3팩에 5000원으로 값을 내려 팔고 있다. 떡은 가지가지 푸짐했지만 좋은 시절은 떠나보낸 것 같다.
젊은 손님이 많다 해도 영천시장의 주된 고객은 노인들이다. 시장 밖에 한참 서 있다가 멀리 동행이 오자 노인은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느려”, “부지런히 온다고 왔는데 아무리 걸어도 굼벵이 걸음이야.” 기다리던 노인은 장바구니를 들어주며 중얼중얼 세월을 탓한다.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고들빼기며 민들레, 씀바귀 따위를 한 바가지씩 쌓아두고 파는 노점들이 보인다. 어떤 상인은 한약재도 팔고, 어떤 상인은 말린 생선 등을 팔고 있었다. 노점 상인들은 시장 안보다 더 늙어 보인다. 시장 상인들은 세대교체가 제법 된 듯 젊고 파릇해 매대도 깔끔하고 갖춘 상품들도 때깔이 좋았다.
옛 흔적 지울 영천지구 재개발 사업
가게 앞에서 중늙은이 셋이 말다툼 끝에 “아무래도 족발보다는 전이 더 낫다”며 전집을 향했으나, 포장만 된다는 말에 핏대를 올렸다. 주인의 잘못도 아니고 오직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빚은 불편임에도 누군가는 도통 견디질 못했다.
시장 입구부터 안산 방향은 길이 막혀 있다. ‘철거 예정’이라는 붉은 글씨에 ‘출입금지’를 붙인 노란 딱지들이 골목을 막고 있다. 영천지구 재개발 사업이라는데 시장에 붙은 일부 지역이 사업구역으로 묶였다. 독립문 앞에는 전국철거민연합회의 승합차가 서 있고, 연신 투쟁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행인이나 지나는 차량 모두 무심히 ‘투쟁하는 철거민이 철거에서 해방된다’는 구호를 지나쳐 갔다. 누군가에게는 수천억이 쏟아지는 노다지판이고 누구는 철거의 아픔에 목이 멘다.
영천구역 재개발 사업은 골목을 밀어내고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다. 부동산 업자들은 로또 청약이라며 꼬드기고 있다. 노인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장바구니 담은 수레를 끌고 안산 비탈을 어렵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점점 골목은 사라지고 독립문 근처 서울 도성 밖 비탈 자리 하나라도 차지해 제집을 지녔다는 안도감에 부지런히 살던 이들의 흔적은 지워진다. 또 한 곳 우리가 간직한 집단의 기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박완서는 서울에서 살았던 그 많던 집들은 도통 기억하지 못해도 오직 안산 아래 현저동 괴불마당집은 주소까지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소설 속에서 온전히 살아 있는 산비탈 하꼬방의 복잡하고 구불어진 골목길은 이젠 없다. 그나마 남은 골목도 이제 곧 지워질 것이다. 박완서는 전쟁의 공포와 상처 속에서 그 골목의 “진국스러운 인심을 생각하고 마치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처럼 밝아지고 있었다”고 썼다. 영천시장 주변은 아직도 그런 인심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 사람 살던 골목에 가시풀이 자라고 온통 돈나무가 움트기를 기대하는 시대에도 비탈에 기댄 긴 골목길을 걸으며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