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누구나 평생 안고 가는 질문이다. 어떤 때는 성선설에 공감하지만, 다른 때는 성악설에 동의한다. 인생을 절반 정도 살았다면, 결론에 도달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저널리스트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쓴 <휴먼카인드>(2019)는 이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 브레흐만은 인간 본성에 대한 증언 같았던 고전적인 사회심리학 실험들을 파헤쳤다.
지난 2005년 5월 9일,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미국 미시시피주 빌록시에서 비상대책팀 자원봉사자들이 콘크리트 더미 등 잔해를 치우며 복구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AP연합
먼저 스탠퍼드대학 교도소 실험이다. 이 실험은 감옥을 만들어 평범한 학생들을 ‘교도관’과 ‘수감자’의 역할을 하게 했다. 역할만 주어졌을 뿐인데 교도관들은 가학적 행동을 보였고, 수감자들은 우울과 무력감을 보였다. 이 실험이 암시한 사실, 평범하고 선한 시민도 부정적인 상황에 놓이면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끔찍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
한편 예일대학 스탠리 밀그램 실험도 유명하다. 밀그램은 ‘교사’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학습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오답을 말할 때마다 전압을 높이는 스위치를 누르게 한 실험을 했다. 참가자의 65%가 450V에 이를 때까지 스위치를 눌렀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백만명을 가스실로 보낼 수 있는 생물이라는 함의를 담고 있었다.
브레흐만은 이런 실험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밀그램의 실험에서 교사 역할을 맡은 피험자들이 스위치를 누른 건 지시를 내린 실험자에 일방적으로 복종한 게 아니었다. 피험자들은 자신이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선으로 위장된 악’에 따른 것이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증명한 건 아니었다.
브레흐만이 반박하고 싶은 것은 ‘부정적 인간론’이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공격적이며 공황 상태에 빠지기 쉬운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인간은 오히려 위기가 닥칠 때 최선을 다하는 존재다.
질서정연한 대피를 보여준 현실의 타이태닉호는 그 하나의 사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또 다른 사례다. 2005년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언론은 약탈과 폭력에 대한 뉴스로 가득했다. 그런데 몇개월 후 연구자들은 실제 일어난 일이 달랐다는 걸 밝혀냈다. 델라웨어대학 재난연구센터에 따르면 재난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친사회적인 행태였다. 뉴올리언스에선 용기와 자선이 넘쳐났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지만 실제로 1966년 여섯명의 소년이 태평양 통가제도의 바위섬에서 15개월 만에 구조됐을 때 아이들은 건강했고, 그들이 만든 사회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이 나쁘다고 상상하는 걸까. 이 질문이 <휴먼카인드>의 출발점이다. 브레흐만은 뉴스를 이 ‘잔혹한 세계 증후군’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안전하며 건강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뉴스는 예외적인 것만 보도한다. 매일 끔찍한 뉴스에 폭격을 당하면 세계관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브레흐만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를 만든다. ‘노시보 효과’는 ‘플라시보 효과’의 반대다. 가짜 약을 먹으면서 그 약이 병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면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나쁘다고 믿으면 실제로 나빠질 가능성을 높인다. 브레흐만이 성악설에 도전하는 이유다.
인플루엔셜
그렇다고 브레흐만이 근거 없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흐만이 내세우는 것은 ‘호모 퍼피’, 다시 말해 ‘강아지 인간’이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의 드미트리 벨라예프와 류드밀라 트루트는 여러 세대를 거쳐 야생 은여우를 길들이는 연구에서 친화성이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벨라예프에 따르면 인간은 ‘길들여진 유인원’이다. 가장 친화적이고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자식을 낳고 수만년 동안 번성했다는 거다.
브레흐만은 호모 퍼피로서의 인류가 ‘초사회적 학습기계’라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배우고 유대감을 형성하며 놀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이런 자질로 호모 퍼피는, 개별적으로 뇌가 더 컸지만 집단적으로는 똑똑하지 못했던 네안데르탈인보다 우세할 수 있었다.
인간은 ‘길들여진 유인원’
이 호모 퍼피는 인류역사의 95%에 이르는 시기 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이 평화로운 세계는 정주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사라졌다. 정착민의 삶은 낯선 사람에 대한 불신을 낳았고, 사적으로 소유된 재산은 지켜져야만 했다. 또 공감이나 유대감 같은 호모 퍼피의 선한 속성은 경우에 따라선 외부집단에 대한 공격성으로도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은 자신들의 세계관이 타당하다는 믿음과 동료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전우애 때문이었다.
“우리는 행성 A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정말로 되고 싶어하는 그곳 말이다. … 이제 새로운 현실주의를 위한 시간이 왔다. 인류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이다.”
브레흐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행성 A’와 ‘행성 B’의 비유를 든다. 비행기가 비상착륙을 하다 사고가 났을 때 행성 A에서는 승객들이 서로 도와 탈출한다. 반면 행성 B에서는 이 경우 각자도생의 아수라장이 돼 약한 사람이 짓밟힌다.
브레흐만이 전달하려는 것은 우리가 행성 B에 살고 있다고 믿지만, 현실에서는 행성 A에 살고 있다는 거다. 과연 무엇이 현실일까. 인간은 선하고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브레흐만은 이게 오히려 현실이라는 거다. 새로운 현실주의란 인간의 선함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매일매일 뉴스에 넘쳐나는 폭력과 잔인함을 지켜보며 인간이 선한 존재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이 이웃들과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려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오십에 도달해 마주한 사실의 하나는 인생을 낙관적으로 볼지, 비관적으로 볼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거였다. 이제는 낙관적으로, 그래서 아등바등하지 않고 너그럽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휴먼카인드>는 이런 나의 마음에 과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이제 남은 인생에서는 선한 존재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