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의 2주기 추모 전시회가 문을 열었다. 나에게 첫날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전시장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졌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이었을까. 관람객은 단 2명뿐이었다. 덕분에 작은 전시장 안을 혼자서 아주 느리게 걸었다.
웹툰 「질풍의 노도」의 한 장면 / 다음웹툰
나무판으로 세운 4개의 가벽 중 2개에는 김용균의 사진이 걸렸다. 늘어선 사진들의 제일 오른쪽 윗자리에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사진이 자리했다. 안전모를 쓰고 마스크를 한 채 문재인 대통령에게 만남을 청하는 손팻말을 든 김용균 말이다. 거기서부터 하나, 둘 알지 못했던 김용균의 얼굴을 더듬어간다. 말간 웃음을 짓는 순한 얼굴의 청년을 지나 세상에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의 아기 용균이를 만난다. 그는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이 된 엄마 김미숙의 품에 안겨 있다. 잠시 숨이 멈춘다.
한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2400명이 넘는 사람들 모두 이처럼 고유한 얼굴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숫자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름을 되찾아주려는 사람들이 이 전시를 지어 올렸다. 전시장의 벽 하나에서 그 이름 중 몇과 마주한다. 숫자의 행렬은 이 애통하고 애절한 이들을 비웃듯 끝이 없다. 사라진 숫자들을 가늠해보다 숫자조차 되지 못하는 죽음에 생각이 닿았다.
올여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특별한 조사결과를 하나 발표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 규모를 정밀 조사한 것이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망자가 1만4000명이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까지 정부에 접수된 사망자는 1500여명이 조금 넘는다. 1만2000명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다.
사라진 건 인간만이 아니다. 2006년경 2차진료 기관인 해마루동물병원에 원인 미상의 폐손상을 입은 동물들이 다수 의뢰됐다. 당시에는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사참위는 역학조사를 통해 19가정에서 49마리의 반려동물 피해 의심사례를 찾아냈다.
사건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지 9년이다. 그사이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 대표만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징역 6년형을 받았을 뿐이다(애경산업·SK케미칼·이마트 관계자 등은 2018년에야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피해자들은 가해기업들이 제대로 된 배상을 하기는커녕 공식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런데도 이 참사가 모두 해결된 것인 양 아는 이들이 많다. 사참위가 김보통 작가와 함께 웹툰 ‘질풍의 노도’를 만든 이유다.
‘질풍의 노도’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피해자와 그 곁에 선 이들의 만남과 변화를 10대 주인공 두 사람을 통해 그려낸다. 질풍은 매서운 바람, 노도는 빠르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이다. 이 말들이 청소년 시기를 상징하는 건 고통과 혼란이 세계를 깨는 힘이라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이 지난 수일간 돌바닥 위에서 풍찬노숙하며 사참위 연장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외쳤다. 사참위는 간신히 1년 반 활동을 연장하게 됐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진상조사 업무는 종료라는 단서가 붙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아프고 죽어야만 움찔하는 사회는 움찔했던 기억마저 금세 잊는다. 그러나 싸우는 이들은 질풍‘과’ 노도가 아니라, 질풍‘의’ 노도다.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