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죽으면 바뀌지 않을까요?
확실히 코로나19는 우리 사회 곳곳을 바꿔놨다. 모두가 밥 약속을 기약 없이 미루고, 마스크를 쓴 채 조심히 대화한다. 그렇지만 이런 광경도 잠시, 텔레비전을 켜면 그 안에선 2020년 이전의 익숙한 모습이 펼쳐진다. 프로그램 전후로 삽입되는 자막 한줄만이 팬데믹 상황을 넌지시 알린다. ‘이 프로그램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촬영되었습니다.’
「직장인 감자」의 한 장면 / 만화경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에서는 50명 이상의 집합을 금지한다는데 스태프만 수십명이 넘는 방송 프로그램은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밤샘 촬영이 ‘기본값’인 방송현장에서 노동자들은 아플 때 쉬어가며 안전하게 근무할 수 있는 걸까.
최근 완결된 웹툰 가운데 방송계 노동을 조명한 작품이 있다. 웹툰 <직장인 감자>(만화경 연재, 감자 작가)다.
<직장인 감자>는 생활툰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작중 ‘감자’는 ‘생활’하지 않는다. 늘 새벽까지 빼곡하게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감자는 언제나 일하고 있다. 어느 날은 몸이 너무 아파 간신히 퇴근 허락을 받았는데, 퇴근하려는 찰나 “이것만 하고 가라”며 다시 업무가 날아든다.
감자가 처음 방송계에 발 들인 건 취업 연계형 아카데미를 통해서다. 아카데미는 취업 못지않은 경쟁률을 보이며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 학생을 선발했지만, 그들이 연계한 건 고작 무급 인턴이었다. 제작사 사장은 인턴사원들에게 온갖 잡무를 떠맡기고 계속 야근을 시키는데다 성희롱까지 일삼는다. 괴로운 노동환경에서도 감자는 정규직 전환을 꿈꾸며 끊임없이 ‘견디자’라고 주문을 왼다.
그러던 어느 날, 감자는 마침내 정규직 일자리를 제안받는다. 급여가 턱없이 적은데다 심지어 지급이 밀리기까지 하지만, 돈을 주는 게 어디냐는 생각에 감자는 회사에 지원한다. 회사 안에서 감자는 ‘라꾸라꾸 지박령’이다. 회사 안의 침대에서 쪽잠을 이룰 뿐 퇴근하지 못한다. 새벽까지 야근이 이어지고 쉴 새 없이 일감이 쏟아진다. 그러던 중 감자는 외국의 방송국 문화는 여기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를 접한다. “일하다 많이들 죽어서 저렇게 근로시간 딱 정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우리도 많이 죽으면 바뀌지 않을까요?”
이 대사를 읽으면서, 불현듯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지난 2월, 방송국의 횡포와 싸우다 죽은 고 이재학 PD다. 그는 16년간 방송국에서 온갖 일을 도맡았지만, 스태프들의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제안했다가 한순간에 해고당했다. 이재학 PD 이전에는 이한빛 PD도 있었다. 이름이 쌓여가는데도 방송계 노동환경은 여전히 척박하다. 노동환경이 변하지 않는 건, 때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감독관이나 책임자의 의식 있는 행동 하나로 모든 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이 근로계약서를 쓰고 주 52시간 노동을 준수했던 것처럼.
2020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코로나19에 시달리다 끝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올해의 화두를 꼽으라면 노동을 말하고 싶다. 올해 여러 노동현장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쩌면 지킬 수 있는 생명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려 했던 고 이재학 PD를 기억한다. 그를 비롯해 올 한 해 일터에서 떠나간 모든 노동자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