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에서는 사회학을, 대학원에서는 국문학을 공부했다. 사회과학이 사실을 다룬다면, 문학은 허구를 다룬다. 허구란 이야기다. 왜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걸까. 혹시 삶이 이야기라고 무의식으로 생각해왔던 건 아닐까.
50대가 돼서도 소설은 계속 읽었다. 최근 읽었던 놀라운 이야기가 얀 마텔이 2001년 내놓은 <파이 이야기>다. <파이 이야기>는 좀 독특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피신 몰리토 파텔이란 사람을 인터뷰하고 관련된 자료들을 정리한 형식을 취한다. 파이는 파텔이 자신의 이름 피신이 피싱(pissing·소변을 보는)으로 놀림을 받자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파이는 재미있는 소년이었다.
소설은 허구다. 하지만 이 허구는 삶의 진실에 가깝게 다가서 있다. 사진은 소설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스틸사진 / 해리슨앤 컴퍼니
“한때는 의심도 쓸모 있는 법…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망망대해에 호랑이와 단둘이 남은 소년
‘정지’가 없는 소년은 마주하는 종교마다 열렬히 뛰어들었다. 흥미로운 건 소년에게 각 종교의 신이 함께 존재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부모와의 외출에서 가톨릭 신부와 이슬람 지도자와 힌두 사제가 만나 파이를 두고 자신들의 신도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종교를 하나만 가져야 한다고 했다. 소년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이 여러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어느 날 인도 폰디체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소년의 아버지는 동물들을 팔고 캐나다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미 판매돼 운반해야 할 동물들과 파이의 가족은 화물선에 탔다. 그런데 배가 갑자기 침몰했다. 소년은 구명보트로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그리고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와 함께였다. 동물들이 하나둘 죽어 나갔다.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 남아 있게 됐다.
갈증과 허기와 호랑이. 소년은 비상식량으로 당장의 갈증과 허기는 면했다. 하지만 호랑이와 단둘이 남은 구명보트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소년은 포기의 순간에 스스로가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구명보트에 연결된 뗏목을 만들고, 거기서 머물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년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다. 물리적 위력으로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굶주리는 호랑이를 그냥 놓고 보다가는, 벌벌 떨고 무서워만 하다가는 어느 날 배고픈 호랑이의 식사가 될 뿐이었다. 호랑이와 단둘이 탄 배에서 살아남으려면 호랑이를 길들여야만 했다.
호랑이 길들이기. 이 새로운 선택으로 소년은 살게 됐다. 소년은 허기와 갈증으로 시달리는 호랑이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시끄러운 호루라기로 훈련을 시켰다. 평생 채식주의자로 살던 소년에겐 물고기를 잡는 것만 아니라 잡은 물고기를 죽이는 것도 어려웠다. 비상 식수는 곧 떨어질 터였다. 태양증류기로 어렵게 물을 모았다. 호랑이와 같이 살아가기 위한 고된 나날이 시작됐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작가정신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에 직면하고 그것을 길들이려고 나서자 공포는 소년을 살게 한 힘이 됐다. 그러니까 공포를 이기는 법은 공포를 잊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공포가 거기에 있음을 응시하고 공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임을 소년은 발견하게 됐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존의 조건 앞에서 소년은 절망하고 슬퍼할 틈이 없었다. 부지런히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구했다. 그리고 소년은 신앙심에 기대 자신의 고통을 서서히 수용해 나갔다. 모든 신을 포용했던 소년이었다. 망망대해에 호랑이와 단둘이 살아남은 이 배에서 소년은 처음부터 신과 함께 있었던 거였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 이야기>의 첫 번째 버전이다. 그런데 소설 말미에는 짧은 두 번째 버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두 번째 버전에서는 동물들이 나오지 않는다. 첫 번째 버전의 동물들이,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여러 실제 인물들을 상징하고 있음을 비로소 독자들은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허구인 소설을 읽는 이유
어느 버전의 이야기든 리처드 파커가 소년을 살게 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두 버전 모두에서 소년은 배가 침몰해 가족을 다 잃었다. 그 과정은 비극이지만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인도에서 시작한 여행 중 227일 조난당했던 소년은 이제 캐나다에 정착해 단란한 가족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소년은 자신이 탔던 배의 침몰을 조사하러 나온 일본 운수성 소속 관리에게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나은지 물었다. 어떤 것이나 증인도, 증거도 없는 소년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년만 아는 이야기다. 일본 관리나 독자나 결국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쪽을 고르는 수밖에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삶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만한 이야기로 추려놓으면, 그 이야기는 사실에는 아주 가까워질지라도 진실을 모두 드러낼 수 없다. 한 사람이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어왔는지, 삶의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게 소설을 읽는 이유이지 않을까. 우리는 새로운 정보나 전문적 지식을 얻으려고 소설을 읽지 않는다. 소설은 허구다. 하지만 이 허구는 삶의 진실에 가깝게 다가서 있다. <파이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은 삶이 이야기이고, 어떤 이야기를 택할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거다. 그건 어떤 삶을 살지의 문제이고, 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의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다. 아니 가지고 싶어한다. 지나온 나의 삶은 어떤 이야기로 이뤄져 있던 걸까. <파이 이야기>가 파이의 이야기라면, <지연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일 거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삶의 제일의 목적일 거다.
다소 건방져 보여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