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천양희의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에 실린 시 ‘마음의 수수밭’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십 년을 책꽂이에 꽂힌 채 낡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처음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3월 2일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서울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 앞에서 관계자들이 대화하고 있다. 교보생명은 봄을 맞아 ‘광화문 글판’을 천양희 시인의 시 ‘너에게 쓴다’로 교체했다고 말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20대의 내가 ‘마음의 수수밭’을 이해했을까. 선물 받은 책인가 보니 섭섭하게 앞장에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생일이면 시집을 선물하곤 했다. 생일을 핑계로 술을 진탕 마시고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표지를 열면 거기에 다정한 축하 인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몇 장을 휘적휘적 넘기다 보면, 친구가 하고 싶은 말, 나누고 싶은 감정이 우수수 쏟아졌다.
하나의 고통을 지나면 또 다른 고통이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는 말에 붙들려 책을 든 채 서서 시집을 읽어가는 건 지금이다. 이미 50년을 살아버린 사람에겐 지나온 수수밭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금성, 개밥바라기별이 나왔다니 저녁인 듯싶다. 키 크고 빽빽이 자란 수수밭이 내게는 쓸쓸하고 황량한 풍경이다. 어느새 나이가 이만큼 들고 보니 마음이 문득 쓸쓸하고 황량할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종종 닥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시집이 나온 1994년에 시인의 나이는 50대 초반이었다. 50대의 나는 이제야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수수밭이 뜻하는 건 바로 휑하니 찬바람이 부는 쓸쓸한 마음인 거다. 나 역시 마음이 수수밭을 지날 때면 이 길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며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다소 미련스럽게 해 나갔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삶의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 안의 어두움으로 숨어드는 건 답이 아니다. 시인은 머리를 흔들고 산을 본다. 거기에 싱싱하고 푸른 하늘의 자리가 펼쳐 있다. 시인은 혼자가 아니다. 푸른 것들이 올라가라고 어깨를 치고 솔바람이 부추긴다. 시인은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길을 오른다.
돌아보면 내게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었다. 고통과 괴로움은 다르다. 고통이 밖에서 오는 것이라면, 괴로움은 그걸 붙잡는 내 마음이다. 삶은 곳곳에 고통을 펼쳐 놓는다. 20대의 나는 눈앞의 고통을 벗어나면 행복한 삶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고통을 건너고 다음 고통을 맞닥뜨리는 순간을 거듭하며 지쳐갔다. 이제 50대의 나는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날 때 중요한 건 고통을 괴로움으로 만들지 않는 것일 거다.
그런데 그게 가장 어렵다. 괴로움은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상태다. 혹은 고통을 없애려고 내가 스스로를 괴롭히는 상태다. 고통 없는 인생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거기에 새로운 괴로움이 생긴다. 이게 진짜 삶일까.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울까. 밖을 내다보기보다는 내 안으로 숨어든다. 때때로 고통을 절대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느라 현재의 삶의 기쁨을 놓친다. 그건 또 다른 괴로움이다.
창비
시인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쓸쓸함에서 쓸쓸함으로 이어지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이어지는 삶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 나는 그것을 수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통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길을 나서려고 할 때,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이 시집 마지막에는 문학평론가 김사인이 쓴 발문인 ‘절망을 넘어선 시의 표정’이 실려 있다. 김사인은 천양희 시인의 시쓰기란 ‘길에 대한 열망과 모색’이라고 일러준다. 그 길이 “억울하게 탕진된,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진 그의 생이 안식을 얻을 삶의 길”이라는 김사인의 말이 바로 내 이야기처럼 뜨끔하게, 그러나 희망처럼 들렸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하는 걸까.
일어나 멀리 갈 때 나는 나다
시 ‘새에 대한 생각’을 읽다가 “사는 게 이게 아닌데” 같은 구절과 마주한다. 가슴이 철렁한다.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날고 싶지만/ 삶이 덜컥, 새장을 열어젖히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이 자리가 아닌 것 같지만 길을 나서기는 어렵다. 이 자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냥 살던 대로 웅크리고 가만히 있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살던 그대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때, 좁은 세계에 갇혀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 때가 찾아온다.
‘새에 대한 생각’은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인 것이다”로 끝난다. 시인의 생각을 다 읽어내긴 어렵지만, 내가 나로 살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읽으면 되지 않을까. 원래부터 날개를 가진 새로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것 말이다. 그렇게 이 구절을 내 방식대로 읽고 나서 얻게 되는 건 용기다. 이 길을 나서는 게 옳은지, 이 길 끝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지금은 따지지 않기로 한다. 일어나 멀리 갈 때 나는 나이고, 그 길의 끝에는 내가 있다고 믿기로 한다. 그러니 망설일 것이 없다.
쉰에 이르러 길을 묻는 이 연재에서 <마음의 수수밭>을 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가 놓인 상황을 돌아보는 것은 길을 묻는 출발로 꼭 필요하다. 거기에 덧붙여 오십에 나아갈 길을 묻는 게 묻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나와 마찬가지로 길을 묻고 있는 길동무들도 길을 묻고 길을 찾아 나섰으면 좋겠다. 삶이란 부단히 떠나는 것이 아닐까. 떠나야만 하는 거라면, 두려움 없이 떠나는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건 아닐까.
“비로소 진로란/ 우리들 생이 그렇듯/ 비뚤비뚤하거나 비틀비틀한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시 ‘진로를 찾아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가다 보면 반듯한, 평탄한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래도 실망할 건 없다. 일단 떠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비뚤비뚤하거나 비틀비틀한 길이라 해도 내가 선택한 소중한 길이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