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왜 안 나빠졌지.”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는 정준기 서울대 명예교수(68)가 선배들에게 듣는 짓궂은 농담이다. 14년째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정 교수는 건재하다. 그를 지탱해주는 원천은 글에 있다. 2018년 33년간 재직했던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직한 뒤 활자에 대한 애정은 더욱 짙어졌다. 한국 핵의학 분야의 초석을 다진 핵의학 권위자인 그는 수필집 6권을 발간한 ‘글쟁이’이기도 하다.
전공 의학에 매진했던 그는 1998년 인도 여행을 계기로 글에 빠져들었다. 인도 타지마할을 방문한 뒤 느낀 벅찬 감정을 여행기로 풀어냈고, 그때부터 틈틈이 글을 썼다.
“학창시절에 문예반도 아니었고 오로지 대입 시험공부만 했죠. 그런데 대학에 오고 연구를 하면서 보니까 남들보다 논문을 빨리 쓰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문필에 재주가 있나’ 생각했습니다.”
논문도 많이 썼다. 2005년 위암이 발병하고 이듬해 파킨슨병이 찾아왔지만 투병 중에 300여편의 SCI급 논문을 썼다. 논문으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은 수필로 채웠다. “아프니까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파킨슨병 때문에 좀 서둘러 쓰기도 했지요. 증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무엇보다 글 쓰는 게 재미있었어요. 저녁 먹고 난 뒤에 새벽 두세 시까지 썼어요. 과거사도 쓰고 병원 이야기, 종교 부분도 썼고. 이렇게 쓰다 보니 제 인생이 정리가 되더군요.”
의학자로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정년퇴직한 뒤 지금은 국립암센터에서 초빙의사로 일한다. 평생 쌓아온 핵의학 지식을 나누고 공유하는 일도 중요한 과업이다. 핵의학은 이른바 ‘마이너 비인기과’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1995년에 전문과목으로 독립해 전공의 수련과정이 만들어졌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의료인에게도 낯선 분야다. 방사성 물질을 인체 내부에 주입한 뒤 방사능을 이용해 영상을 만들고 치료한다. 개업을 통해 고소득을 올릴 수 없는 분야다 보니 동료도 적고 후배도 많지 않다. 어쩌다 핵의학 용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친척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정 교수는 “안타까운 건 우수한 인재들이 취향이나 적성보다 소득에 따라 전공을 택하는 현실”이라며 “개인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책무가 있는 엘리트가 기초의학 연구를 외면하고 천편일률적으로 개업하는 것은 인력의 낭비”라고 말했다.
은퇴한 노학자의 글쓰기는 계속된다. 최근에는 종교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 “불교에 나오는 말인데 우주에서 인간은 갠지스강의 넓은 백사장에 있는 모래 한 알과 같아요. 그 모래 한 알이 또 다른 갠지스강일 수 있죠.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미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성찰을 합니다.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의심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사유를 통해 인간은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지요.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힘은 의학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에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