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뒤편에 서부역이 있고, 프랑스대사관 쪽 완만한 비탈길에 중림동이 있다. 중림동엔 천주교 약현성당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1891년에 착공해 그 이듬해 완공된 조선 최초의 공식적인 가톨릭 성당이다. 조선 사람으로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이 근처에서 참수를 당했다. 때문에 약현성당과 서소문공원은 천주교 성지가 됐다. 중림동은 약현성당을 중심으로 길고 어둡고 구부러진 골목길을 펼치고 있다.
중림동은 약현성당을 중심으로 골목길이 펼쳐진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중림동 골목의 상당 부분은 사라졌다. 그리고 곧 남은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마도 약현성당과 비슷한 나이를 가졌을 기와집들은 그 긴 수명을 다할 날이 왔다. 골목길과 비탈과 담벼락에 쓴 ‘철거’란 붉은 글씨가 한 시대와 골목의 종말을 알리는 부고장으로 보인다. ‘당신의 흔적은 곧 이 도시에서 철거될 예정입니다.’ 철거라는 단어 하나가 아직도 버티고 있을 골목 주민들을 강렬히 압박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쪽에서 약현성당을 거슬러 오르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집과 골목을 볼 수 있다. 군데군데 빠진 이빨처럼 허물어진 집터가 공터로 남았고, 차들이 주차해 있거나 쇠줄로 출입을 막아 놓았다. 아주 오래된 집의 담벼락 넘어 오동나무가 푸르고 곧게 서 있다. 이 동네 골목엔 오동나무가 흔하게 보인다. 빈 공터에도 오동나무는 담벼락처럼 줄을 이어 서 있으나 누군가 부러뜨리고 꺾어버렸다. 그래도 나무는 질기게 살아남았다. 벽오동을 심으면 봉황이 날아온다던데, 오동나무를 심어 딸이 시집갈 때 장을 만들어 보낸다던데,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짜서 풍류를 노래한다던데…. 이 골목의 오동나무는 폐기물이다.
도심 아파트단지와 쪽방촌이 골목 사이로 이웃한다.
좁고 긴 골목 끝에서 어지럽게 쓴 철거 글씨가 무색하게 노인네가 담배를 물고 길 아래 행인을 노려보고 있다. “언제 철거하나?”라고 묻자 “몇 년째 오늘내일한다는데, 때가 되면 하겠지” 하고 침을 뱉고 돌아섰다. 길가 부동산엔 커다랗게 ‘중림동 5구역 10·11지구 도시환경 정비사업’ 간판이 걸려 있다. 골목과 주택과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들어설 것은 겨우 거대한 빌딩 2채. 이미 이 도시에선 일상이 된 모습이다.
1976년에 발표된 조세희의 중편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앞부분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그러니까 집을 헐라는 거지? 우리가 꼭 받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이제 나온 셈이구나!” ‘난장이’ 가족이 받았던 철거 계고장. 그 집들과 골목을 밀고 들어선 아파트가 있다. 지은 지 50년이 된 ‘성요셉아파트’. 중림동의 또 다른 상징이다.
약현성당을 지키는 성채처럼 지어진 이 아파트의 원소유자는 성당이다. 조세희 소설 속 영희가 키우던 팬지꽃이 뿌리째 뽑히고 들어선 ‘낙원구 행복동’의 아파트는 이제 그 또한 낡고 위태로운 건물이 됐다. 시간이 흘렀으니 이 건물은 또 철거와 재개발의 복잡한 주판질로 바빴다. ‘난장이’ 가족이 겪었던 갈등을 고스란히 되짚은 것이다. 용적률을 높여 재건축을 기대했던 이들의 바람과 달리 도시재생사업에 편입되고 당분간 겉도 속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살아남은 골목길은 재개발 철거를 앞두고 있다.
성요셉아파트는 도시 순례객들의 단골 방문지로 떠오른다. 서대문공원 역사유적 관광자원 조성과 중림시장 특화거리에 맞물려 이 일대는 역사문화거점과 탐방로 조성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아파트엔 아주 오래된 정서, 지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소위 레트로 감성을 자극해 인기가 높다. 도심 속 70년대풍의 아파트는 찾아보기 어려운 색다른 풍경이다.
순례객들의 단골 방문지 성요셉아파트
50년 전만 해도 젊었을 주민들은 이제 대부분 노인이 됐고, 당시 화려했을 간판은 지금에 와서 촌스러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다만 도시재생사업으로 젊은 창업자들이 간간이 스며들고, 디자이너와 작가들이 둥지를 틀어 독특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파트 건너편엔 건축가의 작품으로 도시서점도 들어섰다. 주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LP점도 눈에 띄고 커피공방과 카페도 보인다. 그것들은 호기심 많은 나그네를 위한 것일 뿐 이곳의 낙원구 행복동 주민을 위한 시설로는 보이지 않는다.
성요셉아파트에서 약현성당을 돌아가면 중림동의 깊은 속살을 볼 수 있다. 여기저기 호박 넝쿨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호박처럼 얽혀 살기 때문인지 중림동의 속칭은 호박마을이다. 깊은 골목들이 넝쿨처럼 뻗쳐 꼬여 있고, 그 속에 쪽방촌이 숨어 있다. 성요셉아파트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여인숙 건물이 보인다. 건물 안 복도는 길고, 대낮인데도 촉수 낮은 전구는 복도를 겨우 비춘다. 한여름 복도로 난 숱한 문들은 굳게 닫혀 있다. 주민들은 어디론가 밥벌이를 나갔나 보다. 그 옆 건물엔 알코올 의존증을 앓는 이들을 위한 공동체 건물도 있다.
성요셉아파트는 중림동의 인기 있는 도심 순례지가 됐다.
쪽방촌 건물에서 튀어나온 사내가 골목에 버티고 선 또 다른 사내에게 물었다. “받았어?”, “아니”, “왜?” 답 없는 자를 뒤에 두고 사내는 부리나케 골목을 나섰다. 골목 밖에선 파란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서류에 서명을 받고 상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쪽방촌 주민들을 위해 기업체에서 물품지원 행사를 나왔단다. 순순히 받아들고 돌아서는 이도 있고,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며 핏대를 세우는 이도 있다. 물론 골목 안의 사내처럼 자기 앞에 배당된 자선을 거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쪽방촌의 영혼은 자유롭다.
골목 안에는 아주 오래된 피혁가게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있다. 가게 앞에서 자원봉사자들을 지켜보던 주인은 “한창 때 중림동은 구두공장들이 가득했다. 밤새도록 구두를 만들어서 염천교 가게와 명동 맞춤 살롱에 수레로 실어 날랐다. 지금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겨우 몇 군데 남았는데, 그나마 이제는 문을 닫아야 할 때가 됐다”고 했다. 간판에 적힌 가죽 전문이란 이름은 명성을 잃었다. 새벽차로 서울역에 도착한 이들은 양동, 도동 혹은 이곳 중림동의 여인숙에 짐을 풀고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거나,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할 수 있었다. 피혁가게 주인은 그 시절의 중림동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시절이다.
약현성당 남쪽 골목엔 유독 오래된 감나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감나무에 푸르게 매달린 열매들은 제법 실하게 가을을 향해 몸을 불리고 있다. 성당 옆문을 마주 보고 선 기와집은 영국제 홍차를 팔고 있다. 골목의 정경은 바로 옆 쪽방촌과 많이 다르다. 성당을 곁에 두고 성당만큼 넓게 자리 잡은 가톨릭 출판사가 있어 철거를 앞둔 난장이들의 마을과는 다른 풍경의 우아함과 신성함을 자아내고 있다.
만리동고개와 손기정 체육공원 근처엔 일찌감치 말쑥한 아파트단지들, 그리고 연립주택들이 들어섰다. 그 주변 만리재길 쪽으로는 학교가 많다. 봉래초등학교와 환일고등학교, 소의초등학교가 있고 경기여자상업고등학교가 간판을 바꿔 달은 서울의료보건고등학교가 비탈길에서 학생들을 맞이한다. 교통 좋고 학교가 지척이며 곳곳에 공원이 들어선 곳이라 만리재길과 아현동 사이 주택가 골목은 오래전에 아파트로 개발됐다. 아파트가 들어서지 못한 곳엔 오피스텔 건물들이 자리 잡았다. 만리재에서 서울역 철길을 가로지르던 고가도로는 폐쇄돼 서울로7017이라는 공중정원이 됐다. 젊은이들이 찾아와 공원 구경을 하고 골목길의 막걸리 카페에서 양은 대접으로 탁주를 마신다. 참으로 생경한 광경이다.
골목 곳곳에 피혁가게와 구두공장이 남아 있다.
중림동에서 염천교로 가는 길가에는 생선을 주로 파는 시장이 있던 곳이나, 지금은 거의 문을 닫았고 채소 파는 노점상이 간간이 전을 펼치고 있다. 약현성당 위쪽엔 한국경제신문 건물이 거대하게 들어서 있다. 서울역과 서부역에서 부린 짐들을 보관하던 창고건물은 아마도 쓸모를 다한 채로 골목길 어귀를 지키고 섰다. 개발을 하려 해도, 재생사업을 진행하려 해도 어느 것 하나 쉬워 보이지 않다.
염천교의 상징 수제화 가게
중림동 앞에서 남대문을 향해 경의선 철길 위로 난 다리가 염천교다. 다리는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이 들어선 1925년에 지었다. 그 무렵부터 구두상가가 염천교의 상징이 됐는데, 중림동 일대와 염천교 그리고 길 건너 봉래동에 이르기까지 구두를 만들고 파는 거대한 권역을 이루었다. 염천교에 있던 수제화 가게들은 대략 500여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대충 세어보면 그 10분의 1이나 남았을까 그마저도 여러 곳이 문을 닫았다.
거리의 표지판엔 경성역으로 모이던 피혁창고가 중림동과 일대에 있었고, 그에 잇대어 수제화 공장과 가게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공장들은 1990년대 후반에 성수동으로 대거 옮겼다가 지금은 그마저도 힘을 잃고 있다. 건물은 낡고, 가게들도 활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손님 좀 있느냐’는 질문에 상인은 “요즘 누가 구두를 맞춰 신나? 댄스화나 특수화 수요가 좀 있고, 나머지는 아무도 안 찾는다”고 말했다. 처참하긴 길 건너 봉래동 골목길이 더 극심해 ‘가게 임대, 업종 불문, 식당 가능, 상담환영’ 표지를 붙인 가게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셔터를 내리는 건물 관리인에게 사정을 묻자 “예전 이 일대는 기계공작소, 구두공장, 치과재료상으로 밤낮없이 바빴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재료상이나 몇 군데 남아 있다”고 한다. 겉을 고친 건물들은 여지없이 보험회사 영업소와 콜센터가 들어와 있다.
중림동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약현성당뿐이다. 성당에선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중림동 일대가 무대라고 하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세희는 이렇게 썼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중림동 일대에는 골목을 밀어내고 세운 높은 아파트와 아직 버티고 있는 쪽방촌과 블록집들이 남아 있다. 아파트의 높이만큼 신과 가까운 것이라면 중림동 골목길 쪽방은 그만큼 천국과 멀고 지옥과 가까운 곳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지옥과 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중림동 골목길을 걸으면 눈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