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노는 데 시간과 공을 들여 재미있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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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노는 데 시간과 공을 들여 재미있게 살자

입력 2020.06.05 16:49

수정 2021.06.0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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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아무래도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재미를 찾아 나가 노는 게 아니라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1938)을 읽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건 저자 요한 하위징아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인간 문명이 놀이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시간적으로는 먼 고대부터,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방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인간이 본래 놀이하는 존재라고 해서 누구나 잘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노는 시간은 왠지 떳떳하지 못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놀지 않는 건 아닌데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은 어쩔 수 없다. 노동이건, 작업이건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인생의 목표를 향해 성실하게 일을 해도 모자란 판에 어떻게 돈과 시간을 노는 데 쓰는 걸 스스로 잘했다고 할까. 그러다 별다른 취미 없이 오십대에 들어서고 보니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모르게 됐다. 놀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잉여 에너지의 발산, 힘든 일 이후의 긴장 완화, 장래의 일에 대한 훈련, 충족되지 못한 동경에 대한 보상의 기능으로 분석돼 왔다. 그런데 하위징아는 이런 분석들이 놀이에 대한 열광과 몰두를 설명하지 못하며, 자연이 왜 이런 목적을 위해 긴장과 즐거움과 재미를 갖춘 놀이를 제공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놀이의 본질은 결국 ‘재미’다. 하위징아는 재미가 분석과 논리적 해석을 거부하며, 심리적 범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놀이는 진지하다는 점에서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놀이를 규정하는 것도 어렵다. 또 어리석지 않다는 점에서 놀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립관계도 넘는다. 더 나아가 놀이는 진리와 허위나 선과 악 같은 대립관계도 넘는다.

하위징아가 주목하는 놀이의 의미

하위징아가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형태로서의 놀이의 의미다.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란, 첫째, 자발적 행위다. 둘째, 일상에서 벗어난 행위다. 셋째,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즉 놀이 스스로의 시작과 끝을 가지며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을 갖는다. 넷째, 놀이는 먼저 질서를 창조하고 스스로 질서가 된다. 그래서 불완전한 세계와 혼란스러운 일상에 잠정적이고 제한적인 완벽함을 가져다준다. 다섯째, 사회적 집단의 형성을 촉진하며 그 집단은 평범한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이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하위징아는 의례·축제·경쟁적 경기·예술·법률·전쟁 등 어떻게 보면 일상적이지 않은 거의 모든 곳에서 이 놀이의 흔적을 찾아낸다. 지나치게 외연을 확장해서 놀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희미해질 지경이지만, 그는 놀이하는 인간을 통해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다.

<호모 루덴스>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1년 전, 1938년 발표됐다.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야만으로 치달아가던 때였다. 하위징아는 1940년 자신이 가르치던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이 독일군 점령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강의했다. 이후 나치 비판으로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1942년 석방됐고, 1945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독일의 항복이 5월이니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위징아가 이런 야만에 가장 극명하게 대비해 놓은 것은 그리스 문명이었다. 하위징아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에게서 놀이의 모습을 찾는다. 소피스트는 명예로운 자기선전과 논쟁을 하려는 열망으로 사회적 놀이를 추구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 빈둥거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표현하는 ‘디아고게’는 자유민에게 어울리는 지적·미학적 열중이며, 최종목표이자 완성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학교의 의미 변화다. 학교의 어원인 그리스어 ‘스콜레’는 여가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에게 소중한 것은 여가의 결실이었다. 그런데 이 의미는 이후 변화돼 왔다. 문명이 젊은이들의 자유시간을 제한함으로써 이제 학교는 여가와는 반대인 체계적인 지적 훈련을 받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놀이의 상실로 나타난 이성의 부식

중세의 삶은 놀이로 가득했고,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를 거치면서도 놀이는 여전히 문화의 중심축이었다. 하지만 18세기부터 효율성과 공리주의가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산업혁명과 기술 분야의 발전은 물질문명과 경제적인 요소에 대한 과대평가로 나아갔다. 결국 19세기에 이르러 문화는 ‘놀이 되는’ 것을 중단했다.

놀이의 상실은 이성의 확대가 아니라 이성의 부식으로 나타났다. 하위징아는 나치에 참여한 카를 슈미트의 ‘적과 친구의 이분법’을 비판한다. 그리스 문화의 ‘아곤’, 즉 경쟁적 경기에서 라이벌은 파괴돼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반면 슈미트에게 적은 파괴해야 할 대상이다. 하위징아에게 이건 인간 이성의 슬프고 절망적인 상태다. 하위징아는 사회가 야만과 혼란 속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놀이규칙의 준수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분명 놀이는 소거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질이다. 그런데 어쩌다 놀이는 삶의 여분이 되고 말았을까. 일 마친 저녁이나 주말에, 피곤하니까 좀 쉬고 어떻게든 남는 시간에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으로 남들이 노는 걸 보는 게 놀이일까. 그 화면 안에서 열심히 운동하거나 예능을 펼치는 것은 놀이일까. 남들이 차려놓은 놀이 공간에 돈을 내고 들어가 노는 것은 놀이일까. 하위징아라면 아마도 이런 건 놀이 냄새가 나는 상품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위징아의 말처럼 인간을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보는 데 여전히 선뜻 동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데 일하는 인간만으로는 분명 부족하다.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좋은 삶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제라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남은 오십 년을 계속 재미없게 살지 모른다.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것은 여태 변변한 놀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유 시간을 빼앗아가는 21세기 문명을 탓하기만도 어렵다. 드물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만의 놀이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글씨에 빠져 자신만의 서체를 익혀가는 친구도 있고, 젊어서 다루던 악기를 여태 놓지 않고 소리를 들려주는 친구도 있다. 할 일이 많았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이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재미있게 살고 싶다. 나는 어떤 걸 할 때 재미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차츰 알아가고 싶다. 노는 데 시간과 공을 들여 언젠가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미 반평생을 살아버렸다 해도 너무 열심히 찾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놀이가 아닌 일의 논리 아닐까.

권호욱 기자

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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