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이후의 삶에도 사랑이 문제일까. 젊었을 때의 사랑이란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고, 내 사랑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고, 지금의 사랑이 영원했으면 싶은 마음에 휘둘리는 정서적 긴장 상태였다. 이런 사랑은 점잖은 중년의 삶과는 거리가 멀듯 싶다. 그렇지만 오십 이후의 삶에도 사랑은 문제다. 더욱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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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개인화의 위험에 저항할 수 있는 최상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는 사랑이 다름을 강조하지만 모든 외로운 개인들에게 함께함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 연인들 자신이 입법자이며, 서로에게서 기쁨을 느끼며 자체의 법을 제정한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부부가 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1990)의 한 구절이다.
오늘날 가정 ‘두 개의 노동시장 일대기’
여기서 ‘개인화’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그 주도권을 갖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일대기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다. 이 개인화가 순전히 개인의 선택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확신과 소비의식의 혼합물이다. 이 개인화는 산업사회의 삶의 방식인 핵가족이 갖는 남녀의 성별 역할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노동시장·훈련·이동성 때문에 자기만의 삶을 가지려면 어쩔 수 없이 가족과 인간관계와 우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각자의 ‘개인화된 일대기’다. 개인화된 일대기는 사랑·결혼·가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19세기에 기반을 잡은 산업화는 핵가족의 형성을 조장했고, 핵가족은 ‘집안에서의 무보수 노동’과 ‘집 밖에서의 시장’으로 조직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핵가족 모델은 ‘하나의 노동시장 일대기’와 ‘평생의 가사노동 일대기’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은 점차 ‘두 개의 노동시장 일대기’로 변해간다. 따라서 한 배우자가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오며 다른 한 배우자가 집안일을 하고 정서적 돌봄을 제공하던 핵가족과는 다른 생활방식이 필요해진다. 이제 모든 것이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되고 전통적인 핵가족 모델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개인화 시대를 맞아 남성과 여성은 수많은 가정에서 ‘실망과 죄의식을 번갈아 치르며 세기의 전투’를 벌인다. ‘퇴근 후 아이를 누가 데리고 오느냐’부터 시작해서 ‘누가 쓰레기를 버리느냐’에 이르는 익숙한 전투다. 남편과 아내가 나빠서가 아니다. 양성평등은 양성 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는 제도들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함께 살기로 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치사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현대가 시작되면서 개인화는 전적으로 남성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이후 표준적인 여성 일대기도 급격히 변한다. 이제 양성 모두가 옛날의 역할 모델과 새로운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여기서 저자들은 심리학자 밀러의 연구를 끌어온다. 밀러에 따르면 1970년대 내담자들이 결혼과 육아로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를 자각한 중년여성인 데 반해 이제 삶에서 충족되지 않는 감정적 욕구를 발견한 성공한 전문직 여성들이 상담을 받고 있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은 서구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족의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사회의 핵가족 모델을 ‘정상 가족’으로 보고, 그 외의 다른 가족을 ‘비정상’으로 보는 건 폭력적 시각이다. 현실과 맞지도 않다.
1인 가구는 이미 30%대이고, 비혼율은 늘고 있고, 출산율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한부모가족, 조손 가족, 재혼 가족, 성적 결합이 아닌 동거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새물결
이제 가족이라는 제도는 사라지는 게 아닐까.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현재를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가족은 살아남아 있다. “가족은 내적 고향 상실을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피난처가 되었으며, 낯설고 적대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항구가 되었다.”
저자들은 마을공동체 같은 오래된 결속이 의미를 잃어갈수록 가족과 같은 바로 곁에 있는 결속이 정체성을 찾고 물질적·정신적 안녕을 유지하는 데 더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안정적 관계를 가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한 셈이다.
중년 이후 훨씬 길어진 ‘빈둥지 기간’
오십 이후의 삶에서는 어떨까. 저자들에 따르면, 사회의 변화는 결혼에 있어 중년의 위기를 낳게 된다. 그 까닭은 일반적인 추세로서의 개인화, 특히 여성의 개인화, 기대수명의 연장에 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1870년에 결혼한 커플이 평균적으로 23.4년을 살았다면 1970년에 결혼한 커플은 43년을 함께 살게 된다. 또한 늘어난 기대수명에다 자녀수까지 줄어들어서 여성의 자녀양육 기간이 짧아졌다. 훨씬 길어진 ‘빈둥지 기간’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아이들은 모두 떠날 것이다. 노동의 세계에 속했던 한 배우자가, 또는 두 배우자가 가정으로 귀환한다. 여태까지 전통적인 핵가족의 분업으로 살아왔던 부부라도, 각자 노동시장에 참여했던 부부라도 이제 과제는 같다. 부부는 새로운 공생의 협약을 맺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잘 지내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오십 이후의 삶에서 사랑은 여전히 문제다. 아니 더 중요한 문제다. 결혼도, 가족도, 친밀 공동체도 딛고 설 게 결국 사랑일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저자들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힘이 자신의 고유한 규칙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불안·행동패턴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새겨넣는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이끄는 대로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재혼한다. 또한 사랑은 우리가 자신과 다른 누군가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당신 평생의 사랑이라고? 그것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인생 전체를 위해서 서로를 그럭저럭 참아낼 때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읽으면서 따로 적어놓은 구절이다. 오십 이후의 사랑에 꼭 어울리는 말이다.
로맨스 소설은 연애하고 결혼하는 데서 끝이 나지만 삶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결혼 이후의 사랑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사랑이 아니고서야 자신만의 일대기를 써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까. 세상이란 전장에서 어떻게든 함께 늙어가는 것, 내 몫의 짐을 지고 짐을 진 동반자를 격려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 오십 이후의 사랑은 이런 벅찬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아닐까.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