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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과 여가 사이, 그 균형은 어딜까

입력 2020.03.27 15:36

  •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젊었을 때 ‘일이 뭐냐’는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계를 꾸려야 하고, 자아실현도 해야 하고, 사회에서 하나의 위치를 갖고 관계도 맺어야 하니까, 당연히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주부로 가사를 하면서는 이게 일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생계에는 보조이고, 자아실현이 되는지는 모르겠고, 사회에서의 위치는 간접적이기만 했다.

이준헌 기자

이준헌 기자

오랫동안 직장을 다닌 친구들도 요즘 지켜보면 그들도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취업을 위해 공부하고 직업을 가진 다음엔 일을 익히고 여기까지 달렸다. 정년을 보장해주는 직장이라도 이젠 다닌 기간보다 남은 기간이 훨씬 짧아져 버렸다.

일과 연관해 최근 내 시선에 걸린 말이 ‘파이어족’이다.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란 경제적 자립과 이른 은퇴를 뜻한다. 파이어족은 30대 말이나 40대 초에 은퇴해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20대부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수입의 70~80%를 저축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됐다고 한다. 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뀐 걸까.

일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인의 행복을 훼손하는 자기착취적 사회에 대한 반발은 그동안 많았다. 과도하게 일에 치중된 삶에서 벗어나려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의 추구,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고 자신을 위해 과감히 소비하는 ‘욜로(you only live once·누구나 한 번 사는 거다)족’의 등장, 오직 목표와 성취만을 향해 돌진하는 피로사회에 맞서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유행 같은 건 이미 익숙한 사회 현상들이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

폴 라파르그는 무려 19세기 저작인 <게으를 수 있는 권리>(1883)에서 일에 대한 사랑은 망상이며 고통의 근원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여태 읽은 책 중에 이 책만큼 일에 대해 격렬히 저항하는 책을 본 적은 없다. 라파르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로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의 시대는 온갖 사회주의 상상력이 터져 나온 시기이자 전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이 들끓었던 때이기도 했다. 그의 격렬한 삶은 이 책의 서문이 교도소에서 쓰인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는 ‘현대의 자발적 노예들과 고결한 미개인들에게 고함’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라파르그는 노동을 지적 타락을 가져오고 모든 생명체를 기형으로 만드는 원흉으로 지목한다. 그가 보기에 아름다운 외모와 건강한 신체를 소유한 오세아니아 원주민, 로마인들이 마주친 정결한 게르만족, 여유와 한가로움을 가진 우랄산맥의 바히키르족 등과 비교해 현대 서구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비참했다.

라파르그는 1848년 6월 파리의 노동자들이 ‘일할 권리’를 요구한 것을 비난한다. 그는 노동자들이 기독교, 경제학, 자유사상의 윤리가 노동을 찬양하는 것에 맞서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노동자는 ‘일할 권리’가 아니라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핵심 아이디어다.

흥미로운 건 라파르그가 제시하는 노동의 악덕이다. 지나친 노동은 사회 전체를 과잉생산에 따른 산업위기로 몰아넣고 결국 공황을 일으킨다. 제조업자들은 과잉생산된 상품을 팔러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식민지를 건설하며, 잉여자본은 ‘태양 아래서 빈둥대고 있는 행복한 나라를 찾아내 기차선로를 놓고 공장을 세워 저주받을 노동을 수입’한다.

노동에 대한 열정, 그러니까 너무 많이 일하는 것은 산업의 발전까지도 막는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면 노동이 하루빨리 기계로 대체돼야 하는데 인간이 계속 너무 많이 일하게 되면 대체가 더뎌지기 때문이다.

라파르그는 기계를 ‘인류의 구원자’라고 말한다. ‘천박한 일과 돈 때문에 하는 노역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여가와 자유를 마련해줄 신’으로까지 칭송한다. 라파르그의 이상이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삶’인 한 기계가 인류의 구원자라는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다.

일이 주는 크고 작은 보람들

새물결

새물결

라파르그 시대와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를까. 그의 시대는 아이들까지 하루 12~14시간을 일하던 시대였다. 일에 대한 그의 격렬한 저주가 이해 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린이들은 일에서 벗어났고, 노동 시간은 짧아져 왔다. 이제 노동조합은 법으로 보장되며 복지국가의 개념이 생겼다. 이 정도면 많이 달라진 걸까.

파이어족을 보면 일은 여전히 돈 때문에 하는 노역이다. 현재의 소비에 주력하는 욜로족도 다르지 않다. 일에 평생을 파묻을 수 없으니까 가급적 적은 시간을 일에 내주고 나머지 생에는 자유를 얻겠다는 파이어족이나,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해가며 살지 않겠다는 욜로족이나 모두 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경우는 어떨까. 파이어족의 경우는 얼마나 많이 이들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100세 시대’를 맞은 지금 30~40대에 남은 인생을 감당할 만큼 벌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 않다. 욜로족의 경우는 삶에서 일을 빼버리고 남은 부분에서만 행복을 찾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 모르겠다. 행복한 현재에 취해 미래를 잠시 잊는다 해도 나를 기다리는 긴 노후의 미래는 그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나를 잊어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라파르그가 분명 비웃을 것 같은데 일이 주는 작고 큰 보람이 있다. 미뤄두었던 청소를 끝내고 깨끗한 집안을 바라보는 마음, 요리를 만드는 게 지루하지만 그것을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을 지켜보는 마음, 당장 이 원고를 마감에 맞추어 보내고 한숨 돌릴 때의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 라파르그의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많은가. 일의 많은 부분은 돈 때문에 하는 노역이 맞고, 인생을 즐길 시간을 인색하게 남긴다. 그러니까 문제는 일도 버릴 수 없고 여가도 버릴 수 없다는 거다. 어딘가 그 균형이 있지 않을까. 여태껏도 그랬고 앞으로 남은 생도 그렇고, 오십 이후의 삶을 잘 산다는 건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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