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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천국의 지도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

입력 2020.03.13 15:11

  •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별들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가 됐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 역시 가끔은 밤하늘에 걸린 그런 성좌를 바라보며 걸어가고 또 살아가고 싶다. 인생의 남은 후반을 설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이제라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삶, 그런 인생의 완성을 꿈꾸곤 했다. 그런데 삶은 허공이 아니라 대지에 자리 잡고 있는 거다. 이를 내게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이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3월 10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지하철 역사에서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들이 방역을 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3월 10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지하철 역사에서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들이 방역을 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모두스 비벤디>는 바우만이 2007년에 내놓은 책이다. 바우만은 끝없는 변화, 유동성, 불확실성의 특징을 보이는 근대를 ‘액체 근대’라고 봤다. 액체 근대 이전의 ‘고체 근대’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세계였다. 그런데 이제 액체 근대는 모든 것들을 녹여 불확실한 상태로 만든다.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곳이 모두 녹아 흐르는 게 액체 근대 사회다. 그러니 갈 길을 안내할 지도를 갖고 싶다는 건 지나친 꿈이다.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

<모두스 비벤디>는 이탈리아어판 제목이다. 영어판 제목은 ‘액체 시간’이다. 이 외에도 바우만은 <액체 근대>·<액체 사랑>·<액체 생활>·<액체 공포> 등을 통해 액체 근대의 다양한 모습들을 끈질기게 파헤쳤다. 모두스 비벤디란 갈등하는 이들 사이의 협약을 뜻한다. 이 책의 부제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다.

<모두스 비벤디>가 펼쳐 놓는 세계는 읽을수록 으스스하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국가와 사회와 개인이 마주한 지옥도(地獄圖)가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정보화에 따른 지적 개방과 세계화에 따른 물질적 개방은 현대사회의 ‘개방성’을 한껏 증폭시켰다. 이러한 ‘열린 사회’는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다. 국가가 가졌던 권력은 전지구적 공간으로 흘러나갔다. 사회는 구조라기보다 네트워크가 됐다. 장기적인 안목을 갖게 했던 사회구조들도 사라졌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책임은 결국 개인에게 떨어졌다.

이런 유동하는 세계 안에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은 이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공포에 질려 안전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혔다. 나아가 공포는 방어적 행동을 유발했다. 그리고 스스로 더욱 증식해 가고 있다.

근대의 공포가 액체 근대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근대는 전통사회에 존재한 ‘자연적인 유대’를 깨뜨리면서 나타난 사회다. 그래서 근대는 근대인들에게 새로운 보호막을 제공해야 했다. 고체 근대는 결사체, 노동조합 같은 새로운 집합체가 안겨주는 ‘인위적인 연대’로 전통사회의 자연적인 유대를 대체했다.

그런데 액체 근대에 이르러 이 고체 근대의 연대가 사라지면서 공포에 대한 관리가 사라졌다. 세계화에 따른 탈규제와 개인화를 겪으면서 연대는 ‘경쟁’으로 대치됐다.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고, 노동자-자본 간의 장기적인 상호협정도 깨어졌다. 잉여 인구는 사회에 다시 흡수되지 못했고, 비용을 더 줄여가는 ‘경제적 진보’의 부산물인 ‘쓰레기’로 남아 있게 됐다.

후마니타스

후마니타스

또 유동하는 세계의 도시는 이제 외부의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라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위험의 근원으로 변했다. 도시가 지구적으로 생긴 문제들이 쌓이는 ‘야적장’이 되어 가는데도 이를 해결할 지역적 해법은 미약하기만 했다. 이런 도시 생활은 결국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애착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풍경을 이뤘다.

나아가 불확실성은 유토피아마저 잠식했다. 바우만에게 유토피아는 ‘정원사’의 마음가짐이다. 정원사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관리하게 된 작은 부분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정성스럽게 가꾼다. 스스로 만든 질서를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정원사는 고체 근대를 상징하는 인간형이다. 근대라는 문명과 이 정원사의 ‘낙관적인 세계, 즉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사는 세계’는 잘 어울렸다.

유토피아마저 잠식한 불확실성

문제는 액체 근대에 이르러 이 유토피아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현재는 ‘정원사의 태도’보다 ‘사냥꾼의 자세’가 우월한 때이다. 여기서 사냥꾼이란 우리 동시대인의 상징어다. 사냥꾼은 사물의 균형에 관해 신경을 쓰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사냥을 한 다음 다른 사냥터를 찾아 떠난다. 주위는 모두 외롭고 성난 사냥꾼들뿐이다.

“사냥꾼의 대열에 끼어 있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 무시무시한 경구다. 사냥꾼은 이 말을 되새기며 패배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사냥꾼의 유토피아는 참담하다. 원래의 유토피아란 ‘고생이 끝날 것이란 약속’이었지만 사냥꾼의 유토피아란 계속 사냥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고생이 결코 끝나지 않는 꿈’이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멈춘다.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중간이라는 이유다. 그리고 바우만은 결론을 내놓는다. 사냥꾼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이 지옥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고, 나아가 지옥을 받아들이라는 온갖 압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게 그 메시지다. 진정한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지옥에서만은 벗어나라는 잠정적 타협, 다시 말해 모두스 비벤디를 바우만은 제시하는 셈이다.

책장을 덮으니 심란해진다. 지금 여기는 정말 지옥일까. 우리는 끝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사냥꾼일까. 사냥을 그만두면 타인의 사냥감이 되고 마는 걸까. 그렇다면 우린 서로에게 무서운 짐승일까.

바우만의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우울과 비관으로 채색돼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반복해서 바우만의 책을 읽고 마는 걸까. 그 까닭은 바우만이 전하는 진실에 있다. 우리 시대가 지옥이란 바우만의 진단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차라리 불타오르는 연옥이다. 그런데 이 연옥은 천국에 가까운 연옥이라기보다 바우만이 말하는 그 지옥에 가까운 연옥이다.

앞서 말했듯, 삶은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니라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거다. 불타오르는 연옥에서 유토피아의 천국으로 가는 그 성좌의 지도는 바우만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 한다. 천국에 도달할지, 도달하지 못할지를 현재의 나는 모른다. 그러나 지도를 그릴 수 있는 희망만은 지금 내 손 안에 놓여 있다. 손 안에 있는 희망이 밤하늘의 별들로 빛나는 날이 올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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