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진리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점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다. … 어떤 절이나 교회에도 없으며 어느 종교나 선생, 철학자 그 누구도 당신을 진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강연하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경향자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1975)를 옮긴 시인 정현종이 ‘다시 책머리에’에 인용해 놓은 구절이다. 정현종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 이 세상이 한결 더 살 만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다. 나 역시 크리슈나무르티가 벗겨내는 세상의 껍데기와 그 안에서 찾아내는 자유를 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1895년 인도에서 태어난 크리슈나무르티는 13살에 신지학회에 선택돼 미래의 지도자로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1929년 교단을 해체하며 모든 권위와 형식을 거부했다. 이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깨달음을 전했다. 인터넷에 남아 있는 영상에서 그는 형형한 눈빛을 내쏘며 기존의 권위와 기존의 생각과 기존의 나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자유를 누릴 것을 외치고 있다.
몹시 위안이 필요해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집어든 40대 후반의 어느 날도 그랬다. 오래 시도했던 일을 단념하자 이제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깊은 실망과 무기력에 빠져 하루하루를 지워갔다. 오랜 습관으로 계속 책을 읽었다. 내가 책에서 찾은 건 위안이었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해주는 책,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 네가 아니라 세상이 틀렸다고 말해주는 책을 읽고 싶었다.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나무르티가 주는 것은 그런 위안이 아니었다. 그는 권력·지위·명성·성공 등을 얻기 위한 욕망과 함께하는 이 경쟁적인 문화에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과 잔인성과 두려움 위에 세워진 사회는 우리 각자가 이 세계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만 바뀔 수 있다고 덧붙인다.
우리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친 20세기의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가 보는 세계와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21세기는 경쟁과 잔인성과 두려움이 줄어든 세계일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쓴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은 점차 감소되어 왔다. 폭력의 측면을 바라보면 어두운 20세기의 역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의 심리구조는 수백만 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고, 증오와 두려움과 온화함의 기묘한 혼합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 낡은 정신의 완전한 혁명을 촉구한다. 이러한 내적 혁명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에게서도 배움을 구하지 말라고 한다. 모든 권위를 거부하고, 권위를 거부하라는 가르침까지도 거부하라고 한다. 또 외적 권위만이 아니라 체험·지식·이념·관념으로 이루어진 내적 권위를 거부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어제의 죽은 권위가 오늘의 생생한 삶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가능할까. 우리 각자가 내적 혁명을 이루는 것을 통해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 그 고유의 속성을 갖는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 문제의 해결을 개인 각자에게서만 찾는 것은 ‘사회적인 것’의 실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물병자리
그러나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면 어디선가 출발해야 한다. 개인의 변화는 분명 그 출발점일 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즉각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기를 촉구한다. 어디 동굴에 박혀 명상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들·사물들·생각들과의 관계에서 존재한다. 그런 현존의 나를 ‘대면’해야 한다는 뜻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먼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는 두려움을 낳는 경쟁적 교육을 받으며 부패하고 우매한 세계에 살 때 우리는 두려움에 눌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예를 들고 있듯 우리는 직업을 잃을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가족을 잃지 않을까 같은 수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두려움을 은폐하고 그로부터 도피하는 네트워크를 만들며 살아간다.
나의 현재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만 두려움은 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돌아온다. 마음의 심층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생각하고, 과거의 어떤 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떤 것을 즉각적으로 ‘대면’할 때, 마음이 완전히 현재에 살 수 있을 때, 두려움은 없다고 말한다.
“자유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어떤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의식, 모든 걸 회의하고 질문하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집중적이고 능동적이며 활기에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의존, 예속, 순응, 수락을 내던진다.” 자유는 무엇인가로부터의 자유로 충분하지 않다. 자유는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은 채 생생히 현재를 사는 마음의 상태다. 듣기만 해도 시원한데 과연 그런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오십을 넘은 나이이고 보니 잡다한 경험들로 이루어진 ‘어제의 짐들’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이제 무거운 마음은 새로운 변화보다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위로하기는커녕 스스로가 만든 ‘모든 이미지와 체험에 대해 매일 죽을 때’에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정도의 변화를 일으킬 자신은 없다. 무엇이 귀한 줄은 알겠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살아가려면 오래 짊어지고 왔던 익숙한 생각에 의문을 품고, 늘 현재에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오십 년 묵은 체험·지식·이념·관념을 가지고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가지고 오십 년 묵은 체험·지식·이념·관념을 들여다봐야 한다.
진리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다. 이게 크리슈나무르티가 주는 위안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기만 하다면, 늙었거나 젊었거나 상관없이 우리 자신이 진리의 입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몹시 힘든 날, 지나온 오십 년이 후회스럽고 다가올 오십 년이 몹시 불안할 때, 나의 현재에서 답을 찾아봐야 한다. 시간의 더께를 벗고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은 자유로운 눈으로, 대학을 입학할 때 많은 걸 배우되 그로부터 구속받지 않겠다던 그 태도로, 초등학교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하던 그런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