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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감 하나’를 남겨놔야 할까

입력 2020.02.03 16:32

  • 성지연(국문학 박사·전 연세대 강사)

2016년 1월, 성공회대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이 찬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줄을 서 있었다. 줄은 천천히 움직였다. 몇몇 사람은 눈물을 닦는 모습까지 보였다. 오래 가르치셨으니 제자들도 많겠지만, 나같이 한 번도 뵙지 못한 독자들까지 모여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많은 우리가 그렇게 선생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었다.

2016년 1월 17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된 고 신영복 석좌교수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서성일 기자

2016년 1월 17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된 고 신영복 석좌교수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서성일 기자

신영복이 권하는 고전의 삼독

<담론>(2015)을 펼친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를 엮은 책이다.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이 신영복의 삶과 함께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신영복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동양고전에 대한 해석이다. 신영복은 동양고전 공부를 한 것이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기도 했지만 많은 책을 볼 수 없는 감옥이라는 환경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동양고전과 잘못 사귀었다. 초등학교 때였다. 담임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는 같지 않다는 등의 말을 하며 ‘삼강오륜’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학생인 나는 커서 집안일을 잘하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좋은 부인이 되려고 교실에 앉아 있던 게 아니었다. 삼강오륜 때문에 갑자기 남자아이들한테 다 진 것 같았다. 그 뒤로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동양고전 쪽은 일부러 읽지 않았다.

예를 들면, <논어>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에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 군자불기는 군자는 쓸모를 갖는 그릇이 아니라는 뜻이다. 군자는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다, 혹은 군자는 넓은 관점과 통합적 능력을 갖춘 인재다 정도로 자주 해석된다. 나는 사람을 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읽고, 무척 공감했다. 그러니까 사람의 가치는 그의 쓸모에 있지 않고 전인(全人)적인 그 사람 자체에 있다는 말이 아닐까.

문제는 군자에 있었다. 내게 군자는 생업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공부를 할 처지가 되는 중간계급 이상의 남자 정도로 보인다. 게다가 남자들은 종일 앉아서 손님과 술상을 받고 껄껄거리고, 여자들은 새로운 손님이 들 때마다 술상을 다시 봐 나가느라 앉을 새도 없던, 어려서부터 익숙한 명절 풍경까지 떠올리면 군자불기를 아끼기 어렵다.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 슬쩍 끼어드는 느낌이 되어서다.

신영복은 공자와 <논어>를 읽는 독법을 이야기한다. 어떤 것을 불러내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독자의 몫이며, 그게 더 중요하고 어렵다고 말한다. <논어>가 좋은 책인 것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풍부한 인문학적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논어>를 통째로 버리기 아까워진다.

“모든 고전공부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을 읽는 삼독(三讀)이어야 합니다.” 신영복은 이러한 삼독을 통해 텍스트를 뛰어넘고 자신을 뛰어넘는 ‘탈문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논어>에 가부장주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영복은 <논어>에서 사회 전환기에 분출하는 광대한 인간관계에 대한 담론을 발굴하고 있다. 이러한 읽기는 고전의 시대구속성과 한계를 충분히 읽어낼 때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어가자면 동양고전은 방대한 인문학의 보고가 된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주역>, <노자>, <장자>, <묵자> 등의 독서를 통해 현대문명에 대한 대안들을 끌어내고 있다. 신영복의 소개를 따라 때로는 처음 접하는 오래된 지혜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만으로도 <담론>은 오십 이후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준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일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는 분명 20대 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을 텐데도 이런 이야기는 책을 읽는 오십 대의 나에게 하는 말 같다. 오십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가 이 연재의 출발이었다. 실천이고 변화라면 지금 당장 그 공부를 해야겠다. 가슴으로 공부를 하고 그게 내 발을 움직여 삶에 변화를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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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과불식에서 얻는 지혜와 교훈

오십 이후의 삶에서 신영복에게서 소중하게 얻는 것은 따로 있다. 삶의 태도다. 신영복은 20년 감옥살이를 견디게 한 화두로 ‘석과불식(碩果不食)’을 든다. <주역> 산지박(山地剝) 괘의 효사에 나오는 말이라는데, 의미만 보면 별 얘기가 아니다. 씨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영복은 이 석과불식에서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자 교훈을 얻는다. 책에는 초겨울 가지 끝에 마지막 감 하나를 달고 있는 나무 그림이 있다. 신영복은 잎사귀가 떨어진 데서는 환상과 거품의 청산을, 벗은 나뭇가지에서는 삶과 사회의 근본구조에 대한 직시를, 뿌리를 덮은 잎에서는 사람을 ‘거름하는’ 일의 중요함을 읽어냈다.

신영복의 글 속에 인간 신영복을 놓아본다. 20년의 감옥살이라니. 당장 누구라도 자신의 역경이 제일 클 테지만 덧없이 역경의 무게를 재 보자면 이보다 무겁기 어렵다. 그럼에도 신영복은 그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낸다.

환상과 거품을 청산하고 삶과 사회를 직시하는 것은 뜻만이라도 알겠다. 그런데 사람을 거름하는 일은 무엇일까. 거름하는 것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땅에 영양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거름하는 것은 사람이 잘 자랄 수 있게 영양을 주는 일이다. 그 사람이 나라면 이해가 쉽다. 스스로에게 거름을 주는 많은 방법이 있다. 생활환경을 돌보고, 몸을 돌보고, 마음을 돌보고, 공부를 하는 일 아닐까.

왜 ‘나’가 아니고 ‘사람’일까. 신영복은 정체성을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또한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가 본질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에 따르자면 단독자인 개인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속한 ‘사람’을 거름해야 한다. 신영복은 우리가 사람을 거름하기는커녕 ‘사람으로’ 거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경제 논리에 휘둘리면, 자칫 사람을 키운다면서 사람 자체를 거름으로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신영복의 통찰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마지막 남은 ‘감 하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희망이지 않을까. 오십이 되니 내 삶에 늦가을의 찬 바람이 분다. 나는 어떤 감을 남겨놔야 할까. 그게 희망의 감이라고 생각하니 다가오는 삶의 겨울이 왠지 따뜻하게 느껴진다. 신영복이 내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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