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6일(현지시간) 열린 대중음악계 최고 권위의 상인 그래미 시상식에서 미국의 10대 여성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가 주요 부문 본상을 휩쓸었다. 이제 겨우 만 18세인 아일리시는 평생 한 번 받는 상인 신인상을 비롯해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앨범을 모두 받은 최초의 10대가 됐다. 주요 부문 본상 석권 기록은 앞서 크리스토퍼 크리스 이후 39년 만에 처음이다.
빌리 아일리시가 1월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제62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뒤 기뻐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아일리시에게 그래미가 본상을 몰아준 것은 여러모로 파격이라 할 만하다. 아일리시는 어린 여성이다. 중·장년 남성 뮤지션들의 손을 자주 들어주곤 했던 그간 그래미의 행태와 대조된다. 아일리시는 컨트리 등 보수적인 백인 장르를 선호하는 그래미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한 것도 아니다. 10대들이 좋아할 만한 일렉트로닉 소스에 힙합 비트를 적절하게 활용한 팝이 주무기다. 이렇다보니 그래미가 그간 보여왔던 보수적이고 차별적인 행태를 가리려는 쇼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오히려 그래미가 아일리시에게 본상 몰아주기를 하면서 특정 인종·장르 뮤지션에 대한 차별 본능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미국의 흑인 신예 래퍼 릴 나스 엑스는 힙합에 컨트리를 접목한 <올드 타운 로드(Old Town Road)>로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9주 동안이나 1위를 차지하며 역대 최장기 정상 기록을 세웠지만 본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과거 그래미가 흑인·힙합 뮤지션들을 푸대접했던 사례까지 소환되고 있다.
미국의 흑인 뮤지션 프랭크 오션은 2016년 그래미가 본인의 앨범 ‘블론드(Blonde)’를 심사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래미가 대중들의 욕구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캐나다 출신 래퍼 드레이크는 2017년 그래미가 자신의 곡 <Hotline Bling>에 최우수 랩노래 상을 수여하자 “그 곡은 랩노래가 아니라 팝이다”라고 말했다. 이 곡이 크게 히트했음에도 그래미가 본상을 주지 않으려고 꼼수를 썼다는 지적이었다. 미국의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흑인·힙합 뮤지션의 성과물에 대한 평가절하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그는 지금까지 21개 그래미상을 수상했는데, 본상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래미가 보수적인 시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많았다. 스페인 출신의 플라멩코 가수 로살리아가 역대 최초로 비영어곡인 <말라멘테(Malamente)> 공연을 선보이거나 한국의 방탄소년단이 릴 나스 엑스와 무대를 꾸민 것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그래미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이유는 숨길 수 없는 차별과 배제의 본능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행사 주최그룹인 미국레코드예술과학아카데미(NARAS)는 시상식 개최 일주일을 앞두고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인 데보라 두건을 5개월 만에 휴직처리 했다. 두건이 조직의 성추행 문제와 그래미의 불공정성을 주장하면서 단체를 고소한 상황에서 나온 조치였다. 지난 한 해 유독 여성 뮤지션들의 수작이 많이 나와 여성들의 잔치가 될 거라던 그래미는 그렇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