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내시경]약수동 골목길 “서민과 노인 살기에 이만한 곳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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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내시경]약수동 골목길 “서민과 노인 살기에 이만한 곳이 없어요”

입력 2020.01.10 16:38

  • 김천 자유기고가

약수터가 있던 마을 약수동. 지금 그 약수터는 다 사라졌다. 약수동이라는 명성에 맞게 유명했던 약수는 대략 두어 군데 있었다고 한다. 금호터널 근방에 있던 약수는 유명했단다. 터널이 생기고 강남으로 가는 길이 나면서 약수터는 사라지고 말았다. 버티고개 근처 남산 줄기와 응봉 골짜기가 만나는 곳 부근에도 응봉약수터가 있었는데, 위장병에 영험했다는 이곳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약수터는 죽어 약수동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약수동 골목은 약수시장을 중심으로 뻗어 있다.

약수동 골목은 약수시장을 중심으로 뻗어 있다.

약수동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주민에게 약수동의 장점을 물었다. “동서남북 어디든 가기가 쉽다. 강남도 금방이고 시내 어디든 통한다”고 말한다. 하긴 지하철도 3호선과 6호선이 지나가고 금호터널을 통해 동호대교로 바로 닿을 수 있다. 장충동 고개를 넘으면 바로 시내다. 인근에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있으니 주거지로는 좋은 조건이다.

버티고개에서 응봉산 능선을 따라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차도 올라가기 버거웠던 달동네가 있던 곳이었으나 아파트는 남산 조망권을 무기로 꽤 가격대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재건축 이야기가 나올 만큼 세월이 지나갔다. 역 주변 비교적 평지에 있는 골목들은 아파트 건설의 불길을 피했다. 약수시장과 그 건너 다산동 주변의 골목길과 버티고개역 인근 골목만이 약수동에서 살아남은 골목길이다.

약수시장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활기를 잃지 않았다.

약수시장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활기를 잃지 않았다.

터널 생기고 길 나면서 약수터 사라져

약수시장은 약수동이란 이름만큼이나 오래됐으나 예전의 번창하던 시절은 잃었다. 방송을 통해 소개돼 유명세를 탄 순댓국집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 곱창구이집과 돼지갈빗집이 저녁에 술꾼들로 빈자리 없이 붐빈다. 약수시장의 몇몇 떡집은 유명해 시내 전역에 떡을 공급한다고 하나 이제는 떡의 시대가 아니다. 아파트단지 앞 슈퍼마켓 한 곳이 예전 약수시장에서 팔던 물건들 모두를 감당하고 있다. 그러니 시장이 살아남을 턱이 없다. 생선가게나 정육점, 기름을 짜는 방앗간 등 마트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만한 몇몇 업종이 시장골목의 체면을 살리고 있었다. 시장골목은 아파트단지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통로라서 장터로서 역할보다 오직 길목의 용도로 바뀌었다. 시장 한복판 반듯한 블록의 가게들을 싹 지우고 대형건물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골목 안 손님은 유독 노인들이 많았다. 노인들의 느린 걸음을 따라 시장 옆 골목으로 들어서니 노인종합복지관이 있다. 그 옆에 어린이집이 있고, 그 앞으로 약수동 주민센터가 있다. 주민센터에 붙여놓은 현수막을 대충 살펴보아도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이 들었다. 노인들은 부지런히 복지관을 드나들며 약수동에서 버티며 살아남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약수동 골목길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1990년대 이후 약수동 골목길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주민센터 주변 골목길은 집터가 비교적 커 보인다. 이 일대는 1990년대 들어 일찌감치 빌라와 다세대주택으로 바뀌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택이 많았다고 한다. 그 시절 이 동네의 이름이 벚꽃언덕이란 뜻의 사쿠라가오카(櫻丘)였다. 도쿄 시내 마을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남산에 심은 벚꽃이 지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던 저택은 대부분 사라졌고, 한두 채가 높다란 축대 위에 아직도 남아 그 시절의 약수동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복과 전쟁 전후 가파른 산비탈을 타고 막무가내로 들어섰던 달동네 마을은 싹 지워진 채 아파트단지가 남산을 마주 보고 섰다. 골목은 점점 줄어들었다.

버티고개 정상쯤에서 큰길을 건너면 진짜 오래된 골목들이 펼쳐진다. 낡은 블록집들과 가파른 계단, 가내수공업 공장들의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골목길 어질러진 대문 앞을 비로 쓰는 노인에게 여기도 약수동이냐고 물었다. “여기가 진짜 약수동이다”라고 답한 노인은 묻지도 않은 사연들을 털어놓았다. 나이 마흔 줄에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이 골목으로 이사를 왔단다. 이 집에서 아들 둘을 서울대에 보내 막내는 서울대 교수가 됐고, 가운데 아들은 한의사가 됐단다. 그에게 약수동은 편안하고 복 있는 동네다. 골목 모습이 예전과 어떠냐는 물음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고 했다. 한의사 아들이 지어준다는 특제 보약을 먹어도 노인의 허리는 굽었다. 세월은 가고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늙어가는 것이다.

1970년대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다.

1970년대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재개발 반대와 찬성으로 ‘시끌’

골목길엔 재개발 반대와 찬성의 격앙된 벽보들이 붙어 있다. “헐값에 집과 땅을 빼앗아가고, 터무니없는 값으로 분양가를 책정한다”는 반대쪽 벽보는 재개발을 해제하고 도시재생사업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찬성 쪽에선 조합원 소집공고 게시물을 붙였다. 문을 닫고 먼지만 쌓여가는 구멍가게 간판에서 오래된 골목의 운명이 보인다.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마을 복판으로 큰길이 나고 터널이 뚫리고 지하철이 들어섰다. 길 건너 산비탈엔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 입구에 대기업이 마트를 열었다. 이 골목에서 아이를 키우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며 장사한 사람들은 한순간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으로 치부된다. 그 성실함을 세월이 배신하면 그땐 억울한 심정도 들 것이다. 골목 입구에 ‘연결된 길 없음’ 표지판이 눈에 띈다. 이 길에 들어서면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일까. 골목은 골을 뻗어 막다른 골목을 만들어 놓고 있다.

골목 안 담벼락엔 서툴게 ‘월세방 있음’이라고 써 붙인 벽보도 보인다. 이 좁은 골목에 누가 지나다 그 표지를 보고 연락할까 싶었지만 싼 방을 찾아야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버티고개 앞 버스정류소엔 불법체류 자진신고 독려 안내판이 붙어 있다. 특이하게도 베트남어로 된 안내 문구다. 이 골목 안 공장과 싼 월세방에 스며 사는 이들 중 베트남 출신이 많겠구나 짐작한다. 그 때문인지 약수시장 안에도 북적이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인들이 이 주변에 많다는 이야기다. 대략 동대문시장 상인 중 이 동네에 집을 마련하고 공장을 돌리는 이들이 많다. 시장도 가깝고 과거엔 집값도 비교적 저렴한데다 공장에서 일할 일손을 구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 골목 안은 재개발과 도시재생사업 추진으로 편이 갈렸다.

가파른 계단 골목 안은 재개발과 도시재생사업 추진으로 편이 갈렸다.

버티고개에서 약수역 쪽으로 내려와 한양성곽으로 연결된 골목길은 비교적 잘 정비돼 있다. 골목도 널찍하고 아직 넓은 집들이 형체를 유지한 채 남아 있다. 골목 어귀에는 오랜 세월을 버틴 구멍가게도 보인다. 한 마을이라도 골목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약수역 뒤편까지 쭉 뻗은 골목은 좀 더 세련되고 풍요롭다.

골목 안으로 학생들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있다. 비탈 위에 학교가 보이는데 장충고등학교와 장충중학교, 장원중학교 등 세 학교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약수동이 ‘앵구중동’에서 약수동으로, 신당동으로 다시 약수동으로 이름이 바뀐 것처럼 장원중학교는 옥수여중으로 개교해 장충여중에서 다시 장원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단다. 골목을 오가는 학생들은 발랄하고 건강했다. 그러니 학생들이 오가는 골목도 훨씬 빛이 난다.

오랜 세월을 버텨 살아남은 골목 구멍가게도 보인다.

오랜 세월을 버텨 살아남은 골목 구멍가게도 보인다.

금호터널 생기면서 달동네가 개벽

다산동 아래 약수동 골목길이 그다지 변하지 않은 까닭은 이곳이 부촌이었던 탓도 있다. 아파트가 들어선 응봉 쪽 산비탈이 달동네였고, 재개발 찬반으로 시끄러운 버티고개 인근 약수동 골목길도 서민들의 마을이었으나 약수역사거리 주변은 장충동과 한 묶음으로 비교적 부자들이 살았다. 집터들도 큼직하고 아직까지 잘 가꾼 정원이 남아 있는 모습만 봐도 그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부자나 가난한 이들이나 모두 약수시장에 기대 살았는데 지금은 골목마다 마트들이 그 몫을 대신한다. 이 골목에도 마트는 번창하고 있었다.

약수시장에서 북쪽으로 큰길을 건너가면 청구동까지 구획정리가 잘 된 반듯반듯한 골목길이 나온다. 과거에는 집 장수들이 지은 개량한옥 주택단지였으나 반은 아파트단지로 또 나머지는 빌라촌으로 바뀌었다. 봉제공장들이 주택과 빌라 곳곳에 박혀 있고, 옷 짐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골목길을 달리는 모습을 보면 이 골목 사정이 대충 보인다. 다만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스리랑카대사관은 이 골목만의 색다른 모습이다. 골목 안 공장들이 많은 까닭에 자그마한 식당들도 줄줄이 있다. 분식집이며 가정식 백반집, 부대찌개집과 한식당이 번성하는 이유는 이 골목 경제사정이 그나마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다산로 큰길을 건너 장충동 언저리의 약수동 골목은 오래된 2층짜리 일본식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개천이 있던 자리가 복개되면서 길이 생기고, 그 길 주변으로 다시 식당들이 문을 열면서 골목은 번화해졌다. 슈퍼 주인에게 동네 살기가 어떠냐고 묻자 “서민들하고 노인들 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병원이며 식당이며 골고루 있어서 토박이들이 떠나지 않고 뿌리박고 사는 편이다”라고 했다. 이 골목도 변화는 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리기에 얼핏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울 뿐이다. 젊은이들보다 나이든 이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고 건물에 쌓인 세월의 흔적이 두드러진 점이 골목의 역사를 보여준다. 길을 걷는 노인들에게 이 골목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고 묻자 대부분 “30년”, “40년”이란 답이 돌아왔다. 늙어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사람이니 골목은 언젠가 회춘할 것이다.

약수동은 금호터널이 생기면서 개벽을 했다. 응봉산 비탈에서부터 장충동 일대까지 장을 봐 먹던 약수시장은 반쪽에 더 반쪽이 됐다. 살기 어렵던 달동네가 아파트단지로 바뀐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됐다. 가로세로로 난 길 덕분에 비슷비슷 살아가던 사람들과 골목의 모습은 자로 그은 듯 차이가 드러났다. 아마도 별다르지 않던 사람들의 삶이 확연히 달라진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일 듯싶다. 주거형태가 그 사람의 경제사정을 눈으로 확인시켜주고 골목 안 내밀한 사정을 겉으로 보여주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재개발을 향해 가자는 사람들과 필요 없으니 이대로 살자는 사람들이 부딪히고 골목이 소란해진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다툼은 시답잖게 보일 것이다. 또는 아직도 사람 하나 겨우 비껴갈 가파른 계단 길옆 셋방에서 내일 집세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그 떡은 남의 것일 뿐이다.

약수동 골목길엔 이런저런 사정이 다 담겨 있다. 근래 보기 드물게 부와 가난과 욕망과 해탈이 섞여 있는 곳이 아닐까 싶다. 찬바람 불 때 약수시장의 순댓국 한 그릇에서 또 용기를 얻고 살아가는 이들이 그 골목을 걷는다. 오늘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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