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은 달라졌어도 옛 이름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논이 들어선 고개라 하여 논현동이란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지금 이 거리에 논과 밭은 흔적도 없다. 오직 그 이름만 남았다. 논현(論峴), 즉 논고개를 사이에 두고 1970년대부터 개발된 거대한 동네가 논현동이다. 그중에서 지하철 7호선 논현역과 학동역, 9호선 신논현역과 언주역 사이의 논현초등학교 주변 골목이 가장 복잡하고 소란스럽다. 이 지역은 강남의 다른 곳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면이 있다.
서울 강남구 논현초등학교 일대 골목은 일명 선수촌,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밀집지역이다.
논고개가 이름만 남았듯이 강남 상권을 대표하던 영동시장도 시장의 번영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전통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간판이 정비되고 특색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 파는 물건을 다 털어봐야 그 옆에서 번창하는 중형마트 한 곳의 구색만도 못한 것이 솔직한 사정이다. 시장 상인은 “예전 강남에선 영동시장이 제일 컸다. 강남 살면 버스를 타고 여기 와서 다 장을 봐갔는데 이젠 가게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누가 시장을 찾는가. 그냥 이렇게 명맥만 유지하는 것도 다행이다”라고 했다. 떡집이며 반찬가게, 방앗간 사이로 살아남은 옷가게와 신발가게에 진열된 물건들만 봐도 대략 쇠락의 운명이 눈에 보인다. 시장 골목을 살짝 굽은 허리로 힘겹게 걸어오는 노년의 손님은 상인들 모두와 인사를 나눈다. 그만큼 오래도록 시장 골목을 오간 세월의 관록이 보인다.
영동시장은 강남에서 가장 컸던 규모의 덕도 있었지만 개발 초창기 이곳에 구청을 대신하던 영동출장소가 있어서 지역의 중심이 됐다. 집을 사고팔고 전입신고를 하거나 등기부 열람을 하기 위해서는 모두 영동시장 옆 영동출장소와 등기소를 드나들어야 했다. 강남구로 분구가 되고 강남구청으로 옮겨갈 때까지가 가장 번영하던 시절이다. 이제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허망한 이야기다.
영동시장은 강남 개발 당시 가장 큰 전통시장이었다.
논과 밭은 흔적도 없고 이름만 ‘논고개’
강남 개발 초창기 시장 인근은 대부분 2층짜리 신식 양옥집들이 들어섰다. 강남땅 전체에 줄을 긋고 택지를 조성해 팔았다. 월급쟁이들은 은행빚을 깔고 그 집들을 샀다. 작으나마 마당이 있고 유행처럼 목련을 심고 유실수를 심어 골목마다 꽃이 피고 여유가 있었다. 강남에 아파트 건설붐이 불기 전의 일이다. 당시 이 도시에서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아이를 키웠다. 후에 아파트값은 폭등하고 주택은 관리도 어렵고 값이 내려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2000년대부터 주택을 헐고 다가구주택과 원룸을 짓기 시작하면서 골목은 완전히 꼴을 바꿨다.
강남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논현초등학교 인근 골목을 일명 ‘선수촌’으로 부른다. 밤업소에서 일하는 남녀 종업원, 일컬어 선수들의 집단주거지로 소문이 났다. 룸살롱과 호스트바 등 유흥업소들이 강남에 몰려 있고, 이 일대는 강남 어느 곳으로도 쉽게 오고 갈 수 있다. 대부분 이들을 겨냥해 편의시설을 갖춘 집들이 들어서면서 골목의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래서인지 낮 동안 이 동네 골목을 걸으면 고요하고 적막하다.
골목 안에는 주로 미용실 명품대여점 네일숍 피부관리업체 등 특정 업종이 몰려 있다.
해가 질 무렵부터 골목은 깨어난다. 오후 4시, 5시가 되면서 가장 바빠지는 곳은 골목에 줄을 이은 미용실이다. 미용실은 큰길뿐 아니라 좁은 골목길에도 줄을 섰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화려한 미용실은 업계 용어로는 ‘드라이숍’이라 부른다. 미용의 다른 분야보다 주로 헤어드라이어로 빠르게 원하는 머리 모양을 세팅하는 것이 주업이란다. 미용실 디자이너는 “손님 대부분이 자기 마음에 드는 미용실을 정해 계속 다닌다. 단골의 취향은 대충 알고 있다. 그날그날 원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머리 모양을 잡는다. 손이 빨라야 하고 서로 잘 알아서 일종의 팀워크로 신뢰가 있어야 원활히 돌아간다”고 말했다. 손님 대부분은 현금이나 회원권으로 값을 치르거나 한 달 단위로 결제를 한단다. 이 골목의 생리 중에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업소에서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씀씀이가 커서 카드 결제를 하면 세무서의 주목을 받아 자금출처에 나서기 때문이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머리 손질을 마치면 미용실 앞에서 기다리는 차를 타고 출근한다. 유흥업소에서 보내준 차이거나 혹은 계약을 맺고 출·퇴근 영업을 하는 자가용들이다. 미용실의 1차 소란은 저녁 7시 정도면 대부분 끝난다. 늦게 오는 손님도 있지만 유흥업소 영업시간에 맞춰 일이 시작되고 끝나는 편이다. 일반 손님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간혹 결혼식에 참석하는 동네 주부들이나 있을 뿐이라는 것이 미용실 주인의 이야기다.
점집도 일대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오후 5시 해 질 무렵부터 ‘기지개’
잠깐 비어 있던 미용실은 저녁 8시부터 심야까지 다시 바쁘게 돌아간다. 이번에는 명품 옷을 차려입은 젊은 남자 손님들이 역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만지고 간혹 화장과 피부관리도 받고 간다. 대부분 건강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다시 돌아볼 정도로 잘생겼다. 이들은 단장을 마치고 최고급 수입차를 직접 운전해서 깊은 밤 일터로 출근한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남자 선수들이다. 심야의 골목 안 카페 앞에는 수입차 중에서도 가장 비싼 차종이 줄을 이어 서 있다. 이 주변 골목의 젊음은 화려하고 사치하다. 그 부의 근원은 알 수 없으나 확실히 골목 안에서 돈이 넘쳐흐르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여성접대부가 일하는 룸살롱과 남성접대부의 호스트바는 영업시간이 서로 비켜 있다. 정상급 룸살롱의 경우 영업은 대개 밤 12시 전후면 끝나고, 호스트바는 그 시간부터 본격적인 영업이 시작된단다. 룸살롱과 호스트바를 찾는 손님들이 움직이는 시간대가 그렇고, 또 알고 보면 호스티스가 호스트바를 찾고 호스트가 룸살롱을 찾는 뫼비우스의 띠도 이루어진다는 복잡한 사연이다. 일터에서 돈 앞에서 무릎 꿇은 자괴감을 돈으로 서로에게 앙갚음하는 윤회의 지옥도가 반복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일과 사랑과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논현동 골목 안은 평화롭고 서로가 길에서 부딪히면 상대방을 침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 골목의 불문율이다.
1970년대 단독주택가로 개발된 논현동 일대는 원룸임대 건물로 신축됐다.
미용실 옆으로 명품 의류 대여점들이 보인다. 골목을 둘러보면 여러 곳이 전광판까지 동원하여 영업하고 있다. “튀는 의상보다는 은근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선호한다”는 것이 업자의 이야기다. 옷뿐 아니라 명품 액세서리들도 빌려주고 중고 명품들도 사고판단다. 그 옆으로 손톱 관리하는 네일숍이 줄줄이 있다. 미용실에 들르기 전이나 혹은 심야에도 손님들이 찾아온단다. 골목 안에 유난히 눈에 띄는 가게는 고급 속옷가게. 명품 혹은 유명 상표 란제리숍 여러 곳이 성업 중이다. 속옷가게들은 심야에도 영업하고 대략 새벽 5시까지는 문을 열고 있다. 웬일인지 야하고 화려한 속옷은 주로 밤에 팔린다.
골목 안 카페와 식당 그리고 주점들 심지어는 마트까지 밤새 문을 열고 있다. 골목 주민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 밤을 새우며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에 돌아와 새벽 3시에 커피를 마시고 마트에 들러 먹을거리를 사들고 해가 뜨기 전 저마다의 쉼터로 스며든다.
골목 안 대부분의 가게들은 심야영업 또는 24시간 영업 중이다.
밤새 문 여는 카페·식당·주점·마트
영동시장 뒤편부터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다른 주택가에서는 볼 수 없는 묘한 업종의 간판들이 줄줄이 보인다. 이 일대뿐 아니라 역삼동 주택가까지 신점·선녀·도사·철학·운명진단·인생상담 등 신령함을 파는 알록달록한 간판들이 곳곳에 있다. 세련된 문구로 당신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광고판도 눈에 띈다. 어떤 골목에는 대여섯 개의 동업자들이 간판을 걸고 삶의 의문을 풀어준다고 속삭인다. 미용실 주인은 “저들도 경쟁이 치열하다. 미용실에 들러 자주 영업하고 간다.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 금세 손님이 몰리더라”고 했다. 밤에 일하다보면 가슴에 묻고 사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 것이며 또 가슴 열고 그 사연을 들어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골목 안 점집들은 번창하고 운명의 기로에 선 이들은 그곳을 기웃거린다. 미용실 밖에서 바람을 쐬던 디자이너는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이들은 점 보러 자주 안 간다. 기 빨려서 ‘운발’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주택가에 이리 많은 점집이 몰려 있는 것도 이 골목의 특색이다.
심야에 반려동물을 안고 걷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골목 입구에는 24시간 문을 연 동물병원도 있다. 간간이 반려동물용품 가게도 눈에 띈다. 마음이 허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서 반려동물에 애착하는 모습도 이 골목 안의 흔한 일이라고 한다. 고급차에 집착하거나 점집에 드나들거나 반려동물에 관심을 쏟는 것이 골목 풍경 중 하나다.
편의점 주인에게 요즘 분위기를 물었다. “강남 유흥업소도 세가 많이 죽었다. 문 닫는 룸살롱도 점점 늘었다고 한다. 업소 종사자들 씀씀이도 예전만 못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지역에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몰려 있고 그들 대상의 업체들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을 보면 도대체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하경제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바람에 날리는 말에 따르면 한 주점에서 밤새 파는 술값이 억대가 넘는다 하고, 룸 하나에서 뿌려지는 팁이 수천만 원이라 하니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린다. 이 골목 안에서 지갑에 카드 대신 오만원권 지폐를 가득 넣고 현금으로 생활하는 이들의 경제 사정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지난 정권은 지하경제의 양성화를 정책기조로 강조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진행됐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침에 출근해 해지면 귀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다른 모습이 이 골목 안의 진면목이다.
강남 개발이 막 시작되던 무렵 이 골목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그들 중 몇몇 노인들이 아직도 영동시장 옛 가게에 들러 찬거리를 사갈 뿐 거의 다 진즉에 떠나갔다. 골목에 가득한 원룸과 월세방과 외살이 빌라촌들은 뿌리 없이 물 위에 떠 있는 생활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그 골목의 사이사이로 꽃처럼 아름답고 젊은 남녀들이 저녁부터 새벽까지 바쁘게 드나든다. 골목 안 어느 빌라 쓰레기통에 시든 꽃다발이 버려져 있었다. 꽃은 시들게 마련이고 향기와 빛깔을 잃고 나면 처치 곤란의 신세가 된다. 낮에는 고요하고 밤이면 번영하는 이 골목에서 배울 수 있는 세상일의 사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