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쯤 되면 삶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선명해지고, 더 이상 흔들릴 일이 없는,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오십이 되고 보니 그런 건 없다. 외려 반쯤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만 더 급해진다.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건지, 앞으로 남은 삶에선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지금 생각해 놓아야만 한다.
부와 권력은 더욱 소수에게 집중되고 불평등이 심화된 게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전경. / 정지윤 기자
실존심리학자 카를로 스트렝거의 <멘탈 붕괴>(2011)에 따르면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수많은 ‘호모글로벌리스’가 실존적 공황과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반복된 의식에 괴로워한다.” 글로벌 정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는 인류가 호모글로벌리스다. 스트렝거는 이 호모글로벌리스가 사는 시대를 삶의 의미에 집중하기 어려운 시대로 인식한다.
앞선 세대의 삶의 경로를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어디서 답을 찾을지가 조금은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호모글로벌리스가 사는 이 세상에선 앞선 세대가 더 이상 나침반이 되지 못한다. 새로 열린 세상은 기성세대에겐 적잖이 당황스럽고 청년세대에겐 처음 가는 길이다.
스트렝거는 우리 시대를 ‘금송아지 시대’라고 말한다. 금송아지 시대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망상의 시대, 시장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도그마의 시대다. 나이키가 광고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하면 된다(Just do it)’ 신화와 경제성장 숭배는 이 금송아지 시대의 문화적 토대다. ‘창조계급’으로 불리는 상층계급이 생겨나고 빈부격차가 급증했으며, 고급문화까지도 상품화된 판매수익에 의해 순위가 정해지는 수량화를 피하지 못했다.
‘하면 된다’ 망상의 지배 확대
여기에 세계화와 정보기술 발달은 기름을 붓는다. 이 시대에 출현하는 것이 ‘세계적인 자아 시장’과 ‘상품화된 자아’다. 호모글로벌리스가 된 자아는 세계적인 자아 시장이란 경쟁의 장에서 스스로를 비교하고 또 비교당한다.
한편 상품화된 자아의 가치는 순위시스템을 통해 매겨진다. 가장 단순한 세계적 자아 시장인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친구의 수와 연결의 정도로 자아를 평가하게 한다. 세계적인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정보와 오락의 합성어)’ 시스템에선 부러운 삶의 이미지가 넘친다. 순위시스템은 수많은 곳에서 작동하고 내 순위가 저들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끊임없이 평가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지금 약 6000명의 ‘슈퍼클래스’가 세계의 상층계급을 이루고 있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야 이런 상층계급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런 상층계급이 ‘준거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실존심리학은 우리 인간에게 의미 있는 목적을 느끼려는 강한 욕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야 하는데, 문화가 그 기준을 제시한다.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유사한 세계문화를 공유하는 ‘세계적 상징분석가’와 전통적인 중상계층인 ‘국내 상징분석가’들을 대비한다. 이제는 고등교육을 받은 중간계층인 ‘국내 상징분석가’까지 새로운 상류층에 의해 끊임없는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다.
‘하면 된다’는 얼핏 이에 대한 치료제로 보인다. 하지만 스트렝거는 ‘하면 된다’로 인해 망상의 지배가 확대됐다고 본다. 스트랭거가 제시하는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비극적 존재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로 자신의 조건을 선택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진 조건과 이 자의식의 자유 사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하면 된다’는 이와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한계를 넘어설 것을 강요한다. 더 나아가 ‘하면 된다’는 세계적인 자아 시장의 소수의 승자에게 ‘했더니 됐다’라는 상장을 부여한다. 수많은 호모 글로벌리스는 ‘상위 0.5%의 성취를 가치 있게 여기는 자아 시장의 세계적인 순위시스템’ 밖에 서 있다. 부와 권력은 더욱 소수에게 집중되고 불평등이 심화된 게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이다.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세워야
<멘탈붕괴>의 원제는 ‘The Fear of Insignificance(무의미의 공포)’다. 금송아지 시대의 호모글로벌리스는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에 나만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에 끝없이 시달린다. 달리 말하면 내가 무가치하지 않은지, 내 삶은 무의미하지 않은지에 대한 공포다. 금송아지 시대의 성공신화는 생애주기에도 혼란을 준다. 스트렝거는 청년 성공신화가 세계적인 창조계급에게 30세까지 성공의 조짐을 보이고, 40세까지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은 내리막길이라는 공황을 안긴다고 지적한다.
참 다행스럽게도 이것 역시 신화다. 스트렝거는 삶의 비극인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인생의 후반에 창조성을 발휘하는 경우를 제시한다. <코끼리와 벼룩>을 쓴 찰스 핸디의 경우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중년의 위기를 겪고 핵심적인 삶에 집중하기 위해 경영사상가로 변신했다. 프로이트 역시 아버지의 죽음으로 히스테리를 겪으며 이 치료과정에서 어두운 무의식의 세계를 연구하게 됐다.
중년에 이르러 남은 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것은 결국 이 여정의 끝에 놓인 죽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급해지는 만큼 이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런데 놓인 상황은 만만치 않다.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고 절해고도에 살지 않는 한, 스트렝거가 분석하는 호모글로벌리스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금송아지 시대에 자아 시장에 내놓은 상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회연결망서비스(SNS)를 돌아다니다 보면 남들은 참 잘 지낸다. 누군가의 남이 된 나도 대체로 잘 지낸다. ‘카페인 우울증’이라고, 카카오톡·페이스북·인스타그램을 보며 남들은 다 잘 지내는 것 같아 스스로가 초라한 날도 있다. 호모글로벌리스에겐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멘탈붕괴>, 원제로 하면 <무의미의 공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내 삶의 기준을 내가 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아 시장의 순위시스템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 삶의 구체적 조건에서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앞으로 나의 구체적인 삶에선 무엇이 중요할까. 정서적 지지를 해줄 수 있는 가족, 가끔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친구, 내 앞가림은 할 수 있는 건강, 굳은 머리를 열어줄 책,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글쓰기, 일상에서 가끔은 떠날 수 있는 여유, 거기다가 최소한의 삶의 위엄을 갖출 수 있는 돈. 목록이 한없이 늘어진다. 늘어나는 목록만큼 내 삶이 풍성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