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2006)은 2009년 우리말로 옮겨졌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뒤흔들던 때였다. 1997년 외환위기의 트라우마가 있던 우리 사회는 당시 뒤숭숭했고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토론이 활발했다.
월가 점령시위가 한창인 2011년 10월 5일 밤(현지시간), 노조원과 대학생 등 시위대가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에서 월스트리트 방향으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경향자료 AFP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도 퍼져나갔다. 2011년 미국을 중심으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무한경쟁, 자유시장, 규제 완화, 노동 유연성 같은 말들에 대항해 ‘1 대 99 사회’ 같은 불평등을 항의하는 말들이 힘을 얻었다. 그때만 해도 신자유주의에 바깥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바깥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넷은 앞선 저작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유연하고 조급증에 시달리는 새로운 질서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대비해 분석했다. “단기 자본주의 때문에 그의 인간성, 특히 다른 사람과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지속가능한 자아의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는 게 세넷의 진단이었다.
인간 본성과 거리 먼 이상적 인간형
<뉴캐피털리즘>은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를 조명한다. 세넷이 먼저 주목하는 것은 관료제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인 불안정성에 대해 민간기업은 군대의 조직 모델인 관료제를 도입해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 관료제가 부여하는 ‘합리화된 시간’은 개인에게 ‘서사(narrative)’, 즉 이야기를 갖게 했다. 삶에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의 삶을 장기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전략적 사고와 목표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일찍이 베버가 ‘쇠우리’로 본 관료제가 개인의 삶의 안정성에 기여한 셈이다.
세넷이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이 제도가 ‘녹아 사라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권력은 경영자에서 주주로 이동했다. 이에 따라 장기 실적보다 단기 성과를 중시하게 되고 기업은 자신의 안정성을 해치면서까지 구조조정과 혁신을 추구하게 된다. 여기에 통신과 제조 부문의 기술혁신이 잇따르며 ‘이상화된 새로운 자아’가 등장한다. 이제 개인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의 지식기반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에 새로운 조직 및 제도가 나타났다. 세넷은 기존의 관료제가 피라미드식 조직이라면, 새로운 조직은 MP3 플레이어처럼 작동한다고 말한다. 유연한 조직은 정해진 공정에 따라 생산하지 않고, 기존 피라미드 조직의 중간층을 없애는 간소화를 추구한다. 이제 고용은 유동성이 높아지고 비정규직화하게 된다. 오늘날 실업에 직면한 사람들은 교육을 많이 받고 숙련된 기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자리는 저임금의 다른 나라로 옮아가거나, 자동화로 인해 없어지거나, 새로운 기술을 가진 젊은이들로 채워진다. 그 결과 ‘퇴출의 공포’로 번역된 ‘쓸모없음의 유령(specter of uselessness)’이 새로운 자본주의에 떠돌아다닌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의 삶은 어지럽다.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상적 인간형이 인간 본성과 멀다고 말한다. “지나온 삶과 현재가 ‘서사적’으로 연결되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원하며, 특별한 분야에 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데 대해 긍지를 갖고자 하고, 살아오면서 쌓은 경험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체적인 방식이다.” 스스로 노동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를 해왔다고 자부하는 세넷이 파악하는 인간이다.
위즈덤하우스
세넷은 지난 10년간 만났던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닻’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개인은 뭐 하나 단단한 데 없이 유연한 바닥을 딛고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휑한 황무지에 서 있다. 여기에 능력주의로 대처하려 하지만, 퇴출을 면하기 위해 교육과 교양을 갖춰야 한다는 해법이 실은 퇴출의 공포 자체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 또한 쉽지 않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지금 내가 가진 교육과 숙련성이 어느 순간 ‘쓸모없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삶은 ‘표류’일까 ‘항해’일까
세넷의 책을 읽을수록 차라리 관료제의 ‘쇠우리’가 나아 보이고, 이제는 사라진 ‘장인정신’이 나아 보인다. 1점이라도 점수를 올려보려고 학교와 학원에서 시달리다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어린 학생들, 아르바이트와 스펙 쌓기에 시달리며 드물기만 한 정규직을 꿈꾸는 젊은이들, 계속 새로운 지식과 업무를 익히지만 결국 일자리를 전전하는 피곤한 직장인들, 가사노동과 육아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노동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력단절 여성들,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제대로 된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가난한 노인들. ‘쓸모없음의 유령’은 세넷이 분석한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뉴캐피털리즘>이 인상적인 것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첫 번째 대안은 구성원들에게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과 경험들이 축적되는 서사적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대체하는 병렬조직은 구성원에게 공동체의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나 기본소득 역시 경제적 안정성을 제공해 삶의 서사를 되찾을 수 있게 해준다. 둘째, 공적 인정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쓸모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잃어버린 장인정신의 회복은 ‘헌신’을 가능케 하고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세넷은 낙관주의자다. 그는 신자유주의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가 역사의 다음 단계가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낙관주의자일까, 비관주의자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자기 삶에서 장기적인 서사를 확보하는 것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이 신자유주의 문화의 바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우리는 죽는 날까지의 긴 시간을 각자의 생을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무엇을 붙잡고 이 먼 길을 갈까. 내가 쓸모없을지도 모른다는 회의는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내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내 삶의 이야기를 나 스스로 써 나가야 한다는 점일 게다.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삶은 ‘표류’이지만 주체적으로 구성해가는 삶은 ‘항해’다. 역시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행동할 것인가를 올바로 성찰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삶의 비관과 낙관은 전제가 아니라 과정인 것 같다. 내 삶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써 간다면 삶은 결국 낙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