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은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왔다. 분쟁으로 불안정해진 땅에선 더 많은 위험이 도사린다. 낙인에 대한 두려움은 피해자들을 움츠리게 만들고, 폭력은 반복된다. 국제구호단체 ‘국경없는의사회’의 알렉산드라 브라운(55)은 여성·아동 건강과 성폭력 피해 지원 분야의 이야기를 발굴해 대중에게 알리는 의료 커뮤니케이션 코디네이터다. 17년간 호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우간다·남아프리카공화국·남수단·아프가니스탄·케냐 등을 누볐다. 11월 23일 ‘국경없는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찾은 브라운은 “감춰져 있는 성폭력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여성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을 예로 들어볼게요. 가장 큰 관심사는 음식과 물, 쉴 곳을 찾아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죠. 피난길에 강간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더 빨리 해결해야 할 생존 문제가 눈앞에 있어요. 고통스러워도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많죠. 무법지대라는 문제도 있고요.”
‘성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리 잡지 못한 지역도 많다. 브라운과 동료들은 성폭력에 민감한 사회를 만들고자 애쓴다. 연극과 라디오 캠페인은 사람들에게 성폭력이 곧 ‘응급상황’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피해 지원을 안내하는 좋은 수단이다. 경찰·학교와 협력하기도 한다. 피해자들이 진료소에 찾아오면 우선 신체건강부터 살핀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의료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땐 임신중절 수술을 한다.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관련 서비스를 연결해준다. 피해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심리 상담도 한다. 피해를 입증할 수 있게 의료진단서도 발행한다.
“사회마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다릅니다. ‘남성들에게는 그럴(성폭력)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곳도 있죠. 또 한국이나 호주도 마찬가지지만,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라고 생각하는 낙인의 문제가 있고요. 지난해 케냐 나이로비에서 한 젊은 여성이 성폭력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왔어요. 상담이 끝난 뒤 우리가 무얼 더 해줄 수 있을까 물었더니 엄마에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이 대신 엄마에게 딸이 겪은 일을 설명해줬죠. 저희가 피해자와 가족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1년 전 우간다에서 콩고민주공화국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만났다. 이중 몇 명만 인터뷰하면 됐다. 하지만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줄을 섰다고 한다. 한 여성은 용기를 내 성폭행 경험을 털어놨다. 브라운이 할 수 있었던 건 묵묵히 듣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는 “콩고 등의 성폭력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고,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해결 방법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전하는 이야기가 닿는 대상이 때론 다른 인도주의 기관이나 정부 관계자가 될 수 있어요. 많은 기관이 불안정한 지역의 성폭력 문제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해당 국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죠. 전 세계에 만연한 ‘성폭력 낙인’을 깨뜨리기 위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고요. 몇몇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소통을 이어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