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은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통찰한다. 시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데에 길이 있다는 말이다.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촬영자 미상, 아우슈비츠 제5소각로 가스실 앞 야외 화장 구덩이(원본에서 크롭), 1944년 8월./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이렇게 끝이 난다. 프랭클은 유대인 집단학살,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다. 그의 시련에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추위와 굶주림과 학대 끝에 살아남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이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리고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를 내놓는다. 로고테라피는 이 책의 원제인 ‘인간의 의미 추구(Man’s Search for Meaning)’처럼 인간의 의미 추구에 주목하는 치료법이다.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인간이란 의미를 찾는 존재
강제수용소 경험에서 로고테라피로 건너가는 데 핵심적인 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과 응답이다. ‘체로금풍(體露金風)’. 운문 선사의 화두다. 가을바람에 잎이 떨어지자 나무의 본체가 드러난다는 의미다. 소중한 사람들과 강제로 헤어지고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빼앗긴 강제수용소에서 프랭클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
부와 명예와 건강을 빼앗긴 헐벗은 자리에서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들이 절망감으로 죽어간다.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누운 채 자포자기에 빠진다. 프랭클은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 프랭클은 개인의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제수용소라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지는 그 개인의 내적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프랭클이 인용한 니체의 말이다. 수감자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결국 ‘살아야 할 이유’였다. 살아야 할 이유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막연한 희망은 쉽게 깨어진다. 수용소 주치의는 성탄절엔 집에 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깨어지면서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라고 프랭클은 말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그것은 살아남아야 하는 책임이었다.
프랭클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란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점이다. 로고테라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는 다르다. 로고테라피는 “인간을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사회와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정신분석에서 환자는 의사에게 거북한 말을 해야 하는 반면, 로고테라피에서 환자는 의사에게 거북한 말을 들어야 한다. 환자가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돕는 것이 다름 아닌 로고테라피다.
나는 인간이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하다. 인간이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가장 큰 증거가 바로 프랭클 자신의 삶이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을 통한 증언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가 그렇다. 그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그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자신의 시련을 받아들임으로써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아가 로고테라피를 통해 시련을 통과하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모색했다. 이 정도면 시련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다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큰 위안과 가르침을 얻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 무척 다행이고 고맙다.
시련이 오는 그곳에 삶의 의미도
청아출판사
시련은 어느 날 갑자기 바깥에서 온다.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프랭클이 인용한 심리학자 이디쓰 와이스코프 조웰슨은 정신건강 철학을 비판한다.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이 반드시 행복해야 하고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불행하다는 생각은 불행을 가중시키고 결국 불행을 부끄러운 일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불행에서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프랭클은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통찰한다. 시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데에 길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의미를 찾는 존재로 보면 많은 것이 다르게 읽힌다. 수용소 밖이라고 해서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돼 인간은 ‘실존적 좌절’에 이를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실존적 공허’에 빠질 수 있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욕구와 본능의 갈등이 아니라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서 찾는다.
시련이 오는 그곳에서 삶의 의미도 온다. 삶의 의미는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얻어지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그가 아내를 떠올리며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고 쓴 부분을 읽을 때였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풀려나지만 아내를 만나지 못한다. 아내가 수용소에서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료들과 각자의 아내를 떠올리며 빙판길을 걷던 수용소에서의 장면을 쓰는 그의 심정이 내 마음을 무척 시리게 했다.
이 장면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을 가장 생생히 보여준다. 시련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답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앞으로도 쉬울 것 같지 않다. 다만 오십에 이르러 답을 찾는 나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히 안다. 그리고 프랭클이 권한 대로 구체적인 삶 속에서 내게 의미 있는 과제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을바람에 잎을 떨군 겨울나무의 마른 가지와 옹이가 당당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