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서울유족회 이자훈 회장 “역사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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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서울유족회 이자훈 회장 “역사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입력 2019.10.25 17:53

  • 글·원희복 선임기자 사진·김영민 기자

유채꽃 피는 4월이면 제주가 몸살을 앓고, 단풍이 드는 10월 말이면 여수·순천(여순)이 아파온다. 제주는 나름 치유가 이뤄지는데, 여순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그나마 올해 10월 19일 추도식이 열렸고, 10월 21일에는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이 국회에서 열렸다. 그리고 11월 14일 학술대회가 예정돼 있고, 11월 20일 사진집 출판기념회도 열릴 예정이다.

[원희복의 인물탐구]‘여순사건’ 서울유족회 이자훈 회장 “역사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바로 여순사건 71주년의 모습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4·3’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에 반발,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로 인해 좌·우 군인을 비롯해 특히 민간인 1만여명이 살해된 현대사의 참극 중 하나다. 이 사건은 과거 ‘여순반란사건’ 혹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으로 ‘군사반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면서 ‘봉기’ ‘항쟁’ 등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여순사건 서울유족회 이자훈 회장(78)은 여순사건에서 가장 극명한 피해자다. 추도식을 앞둔 지난 10월 18일 그를 만났다.

“여순사건은 정당성을 가진 항쟁”

-부친을 비롯한 일가족 8명이 여순사건으로 숨졌다. 너무 참담하고 비극적인 가족사다. 당시를 기억하는가.

“고향이 여수 남쪽 끝에 있는 섬 금오도다. 할아버지가 금오도에 처음 상점을 열고 번 돈으로 전답을 늘려 재력가가 됐다. 셋째 큰아버지(이윤기)가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대를 다니다 사회주의자가 됐다. 메이지대 통신강좌를 들은 부친(이윤복)은 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몽양 여운형의 여수 건준 핵심멤버 6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고, 여순사건이 나고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 인민위원장을 했다. 정부 토벌이 시작됐을 때 아버지 등 3형제가 부산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을 잘 알던 친일경찰 출신 여수경찰서 형사부장에게 검거됐다. 6·25가 나자 큰아버지를 만성리(여수엑스포 자리)에서 총살형에 처하고 시신을 불태웠고, 아버지는 총살 후 돌을 매달아 애기섬 앞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사촌형제와 고모·고모부까지 모두 8명이 숨졌다. 이는 일곱 살에서 열 살 때 일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경찰의 수사기록이 있는가. 상당수 민간인은 재판도 없이 무차별 살해됐다.

“법치국가에서 이들을 연행하거나, 수사하거나, 재판하거나 한 기록이 없다. 민주공화국에서 불법과 무법으로 사람을 마구 학살했다.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친척은 당시 수형인 명부를 찾으려고 한다.”

-흔히 여순사건은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국방경비대 14연대의 봉기로 시작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진실은 뭔가.

“지금까지 ‘반란’이라 했지만 우리는 ‘항쟁’이라 본다. 역사적 사건은 사건-의거-항쟁 순으로 발전하는데 그 기준은 당위성과 정당성이다. 먼저 당위성은 우리 민족 구성원이 요구한 두 가지, 자주통일국가와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미군정은 토지제도 개혁·친일경찰 척결 등 친일 청산을 않고, 동족인 제주도민의 무차별 진압을 지시했다. 그것을 거부한 14연대 행위의 당위성은 옳다. 그리고 10월 20일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시민총궐기 대회가 벌어지고 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때 주장이 일제 잔재 청산, 몽양 여운형 건국안 절대지지, 토지개혁, 미군정 철수 등이다. 당시 군과 민간의 성명은 14연대만 아니라 여수·순천 전체 민중의 요구였다. 그래서 여순사건은 정당성이 있는 항쟁이었다.”

-여순사건에서 확인된 사망자가 3400여명, 행방불명자는 800여명이라고 하는데 1만명이 넘는 집계도 있다. 정확한 희생자 숫자가 얼마인가.

“전남도에서 조사한 정식 통계가 1만2000명, 국방부 통계는 1만1134명이다. 이것은 당국의 공식 조사다. 그러나 이 통계에 잡히지 않은 희생자도 1만명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생자를 2만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당시 여수·순천 일대 청년들이 몰살해 처녀들이 시집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동안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보상에 대한 특별법은 꾸준히 제기됐다. 2001년 여수 출신 김충조 의원이 처음으로 법안을 발의한 이후 2011·2013·2017·2018년 등 5차례나 여순사건특별법안이 제출됐다. 그러나 해당 상임위인 국방위는 ‘군사반란’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20대 국회에서 여·야 139명 의원이 다시 특별법을 발의, 현재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법안은 부상자 의료생활자금 지원과 위령사업(평화공원 조성·관리) 문화학술 활동, 유가족 복지를 위한 재단 설립자금 출연 등을 담고 있다.

이미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진실화해위)는 여순사건에 대해 광범위한 재조사를 실시했다. 진실화해위는 “군·경 당국은 법적 통제를 받지 않고 ‘즉결처분’을 남용해 많은 민간인들이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됐다”고 결론을 맺었다. 진실화해위는 또 “정부는 희생자 유족 및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사과하고 지원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권고를 이행하지 않았다.

사과·지원안 마련하라는 권고 이행 안해

올해 3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여순사건 당시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내란 및 국권문란죄)로 총살된 희생자 3명에 대한 재심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 없이 군·경에 의해 불법으로 체포·감금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2002년 여수에서 여순사건연합유족회가 발족해 활동했고, 지난 6월 서울유족회가 세워졌다. 서울유족회에는 김원웅 광복회 회장, 이학영 국회의원, 이부영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최병모 전 민변 회장 등 사회 저명인사가 다수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이자훈 회장의 서울유족회가 주관하는 이번 ‘여순 71주년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서울 추모문화제 및 행사추진위원회’에는 민주노총·전농·민변·한국진보연대·주권자전국협회·가톨릭농민회 등 대부분 진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서울유족회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앞 1인시위는 물론이고 행안위 소속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자훈 여순사건 서울유족회장이 71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이자훈 여순사건 서울유족회장이 71년 전을 회상하고 있다.

이자훈 회장은 1941년 여순사건에서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금오도에서 태어났다. 여순사건 이후 스물아홉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와 소년 이자훈은 고향을 등지고 여수 외가로 숨어들어왔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 하나 교육시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빨갱이 아들’이라는 굴레가 그를 따라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빨갱이 아들’임이 드러나 한 학년을 쉬었다가 다른 학교로 편입하기도 했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 여수서중을 나와 여수수산고에 입학했다. 외삼촌들이 빨갱이 집안은 취직도 어려우니 배를 타는 것이 그나마 먹고사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방학 때면 고향 금오도에 내려가 친척들의 참담한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여순사건은 그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1961년 건국대 법학과에 입학,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운동권’이 됐다. 64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학생회장단으로 중앙청 포위농성에 가담하고 중앙청에 들어가 김종필 오히라 메모를 직접 보기도 했다. 그는 64년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될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청와대를 포위하고 있는 상태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청와대에 착륙하고, 그날 저녁 8시 계엄이 선포됐다”면서 “나중 김대중·김종필 자서전에서 안 것이지만 그날 청와대에 헬기를 타고 들어간 사람이 하비브 미국대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박정희가 좌고우면하고 있을 때 하비브 대사는 ‘계엄을 선포하고 강경진압해 위기를 탈출하라’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때 자신이 가정교사를 했던 미군 CIC 요원 친구를 만났다. 그는 “그 친구가 나를 불러내 ‘너 요시찰 인물로 올라 있어 국내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외국에 나가 살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본으로 밀항을 준비하다 68년 여수에서 무역선을 타고 일본 고베로 밀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본명을 숨기고 오사카에서 노동자로 3~4년 일했다.

다행히 그는 한국인 고학생을 지원하는 재일한국장학회 사무국장직을 얻어 재일동포 2·3세 민족교육을 맡았다. 1982년 재일동포 독지가의 후원으로 오사카에 ‘서울서림’을 열었다. 오사카 유일의 한국 서점은 장사가 잘됐다. 그는 “서점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그렇게 번 돈은 재일동포 2·3세 권익·통일운동에 썼다”고 말했다. 그는 1982년 민단과 총련을 통합하는 재일동포 2·3세 문화제인 이쿠노(生野) 문화제를 만들어 20년 동안 계속했다.

전두환·노태우 시절 리영희·고은·백낙청·조성우 등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외국으로 ‘방출’됐는데 이들이 일본 오사카에 오면 반드시 찾는 곳이 그의 ‘서울서림’이었다. 그는 “소설가 황석영이 우리집에 한 달 머물다 북으로 갔는데. 그때 내 인생 이야기를 듣고 ‘형님 소재로 소설을 하나 쓰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안 썼다”면서 웃었다. 그동안 한국 입국이 불허됐던 그는 1995년 문민정부 첫 번째 귀국자로 여권을 받았다. 지금도 서점은 아들이 맡아 운영하지만 예전처럼 책이 팔리지 않는다. 일본도 책을 보는 사람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아베가 존재하는 한 한·일관계 비관적

-지금 재일동포 3·4세의 민족의식은 어떤가.

“과거 ‘한국청년동맹’이라는 큰 조직은 지금 한통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지만 미미하다. 재일동포 3·4세가 되면 90% 이상이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 국적을 얻어 민족·통일 의식이 미미하다. 그나마 총련의 민족학교가 민족교육을 시켰는데 아베(일본 총리)는 조선인 유치원 지원도 끊고 민족학교 고교 무상교육도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조만간 재일동포의 민족·통일교육은 끝날 것 같다.”

-민단에서 민족·통일교육을 하지 않는가. 우리 정부는 매년 100억원 가까운 돈을 민단에 지원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100억원이나 일본 민단에 지원하는 것을 나는 ‘기생충을 양성한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지원받으면서 민단은 극우집단이 돼 모국의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이렇게 방치하는 외교부가 큰 문제다. 오사카 총영사가 새로 왔지만 민단과 등져 시끄럽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정부가 민단 지원을 끊으면 민단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돼 있다. 그 다음 시대 상황에 맞게 재일동포 3·4세의 자발적인 조직환경을 지원하면 된다.”

-최근 우리 국무총리가 대통령 친서를 아베 총리에게 전달하는 등 한·일관계 정상화가 모색되고 있다. 전망은 어떤가.

“아베가 존재하는 한, 아베의 후계자가 계속 나오는 한 비관적이다. 일본은 군국주의 분위기가 정치·경제·언론·학술까지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역사인식은 재정립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우리는 70년간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자주적 역량이 커졌다. 현실적으로 투 트랙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역사문제는 보류하고, 민간교류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뿐이다.”

그는 여순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먼저 언론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 과거 청산 없는 민족은 비극을 되풀이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흔여덟이라는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인다. 매일 1시간30분씩 운동한다고 한다. 기자가 ‘부친을 비롯한 8명이 억울하게 죽은 ‘한’ 때문이라 늙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런 점도 있지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자신들의 한을 풀라고 나에게 ‘힘’을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의 잔인한 질문에 가슴 아픈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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