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자발적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일체감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사진은 만년의 에리히 프롬(1974). 경향자료
대개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편이다. 늦은 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미리보기에 들어가 있었다. 책 추천 알고리즘에 걸렸거나 다른 리뷰들을 읽다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또한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책은 꼭 사야 했다.
검색해 보니 1976년 번역본이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다른 책에서 몇 번 만났고 수업시간에도 들었지만 읽지 않았다.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사회 구조와 역사에 눈이 먼저 갔고 개인이나 심리 같은 건 구조나 체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세상을 설명하는 공식 같은 게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젊었다.
신혼집에 들어가려고 짐을 싸다 보니 ‘변증법’과 ‘유물론’을 제목으로 단 책이 반이 넘었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루카치 책 정도만 남기고 다 버렸다. 몇 번의 이사에 그 나머지도 어디론가 흩어졌다.
고립감과 무력감으로부터의 도피
20여년 만에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에 이끌려 프롬의 책을 읽는다. 프롬에 따르면 불안과 무력감이 인간의 본래적인 조건은 아니다. 프롬은 중세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불안과 회의와 무력감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근대인은 ‘미친 사람 같은 행동으로 무력감을 정복’하려 하며, ‘내적인 충동’에 의해 ‘스스로 노예감독관이 되어’ 일을 하게 됐다.
프롬은 근대가 우리 인간에게 미친 이중성에 주목한다. 근대사회 구조는 인간을 더욱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비판적인 존재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욱 고립되어 외롭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재로도 만들었다.
“우리는 외부에 있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데 열중하여 내부에 있는 속박과 강제와 두려움을 보지 못했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자아를 실현하고 실현된 자아의 삶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로부터 도피의 유혹이 시작된다. 도피는 ‘견딜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으로부터의 도피’다. 프롬에 따르면 그 도피의 메커니즘은 권위주의, 파괴성, 자동순응성의 세 가지다.
권위주의 성격은 새도마조히즘적 충동이 정상인에게서 발현되는 경우다. 새도마조히즘은 새디즘과 마조히즘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인데, 마조히즘이 강력한 권위에 기대 자신을 잃어버리려는 경향을 갖는다면, 새디즘 역시 대상에 의존해 자신을 잃는다는 데서는 마찬가지다.
파괴성은 대상의 제거에까지 나아간다. 성장과 표현과 생존을 추구하는 삶이 억압되면 삶의 에너지는 파괴의 에너지로 변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대상과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도피의 마지막 방식은 자동순응성이다. 자동순응성은 개인이 문화적 양식에 의해 부여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제 자동인형이 된 인간은 고독과 불안을 잃는 동시에 자아를 잃는다.
이 권위주의, 파괴성, 자동순응성은 프롬이 직면한 세계였다. 프롬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나치 등장 후 1933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출간된 1941년은 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였다. 프롬이 지켜본 세계는 나치즘과 파시즘이 대두하고 근대적 계몽과 해방의 이상이 빛을 잃어가고 있던 시대였다.
지금 우리는 프롬의 시대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세계화, 정보사회, 인공지능, 공유경제 등을 생각하면 우리는 꽤 먼 길을 왔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고민하는 것은 빈곤보다 자신이 큰 기계의 톱니바퀴, 곧 자동인형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되어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라는 프롬의 분석과 마주하면 우리는 여전히 프롬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프롬의 처방은 ‘적극적 자유’
휴머니스트
프롬의 처방은 ‘적극적 자유’라는 비전이다. 소극적 자유는 개인에게 고립감과 무력감을 안겨줄 뿐이다. 이 고립감과 무력감에 대한 해법이 적극적 자유다.
적극적 자유는 이성과 감정이 조화롭게 통합된 개인의 자발적 행위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다. 프롬은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은 새도마조히즘적 집착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며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포함한다. 사랑 다음은 일이다. 자발적 행위로서의 일은 전근대의 외적 강제나 근대의 내적 충동으로 인한 강박적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어야 한다.
참 ‘하기 좋은 말’로 보인다. 한 사람에 대한 집착 없이 시작하는 사랑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자발적 행위라면 애초에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그 외의 시간, 예를 들면 청소와 빨래를 다 끝낸 후, 고된 업무를 끝내고 퇴근한 후, 주말 같은 때, 잠을 아껴서라도 하는 어떤 일이 자발적 행위 같다. 누워서 뒹굴지라도 자유는 그럴 때 느껴진다.
자유란, 사랑이란, 일이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프롬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과 일에 고립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는 그의 주장엔 적잖이 공감한다. 훼손된 자유를 버리는 게 아니라 구해내야 했던 것처럼, 훼손된 사랑과 훼손된 일을 구해야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 많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그래서 이 오래된 책을 나는 자기계발서로 읽는다. ‘고립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 찾기’ 정도의 제목이 좋겠다. 프롬에 따르면 삶의 의미는 자발적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의 일체감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프롬은 말한다.
“사랑과 일 속에서, 그리고 정서적이고 감각적이며 지적인 능력에 대해 진정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는 그의 자아에 대한 독립성과 성실성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인간과 자연 및 그 자신과 일체가 될 수 있다.”
책을 읽다 연두색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 부분을 손으로 써서 한동안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사랑과 일과 표현’이라니, 참 평범한 답이다. 젊어서 읽었다면 이런 평범한 구절에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며 삶의 평범함을 생각한다. 평범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나도 어느새 ‘꼰대’가 된 걸까. 씁쓸하긴 하지만 오십에 도달한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