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공짜가 아니다. 폭넓은 관심사를 가져야 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배우고 익혀야 한다. 호기심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다 같이 즐길 이들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책을 읽고 하마터면 동네에 여자축구팀이 있는지 찾아볼 뻔했다. 축구는 국가대항전이나 있어야 봤지 평상시엔 별 관심도 없었다. 선을 하나 그려 가장 왼쪽에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을 놓으면 그것보다 약간 중앙 쪽에 내가 있고 축구를 하는 여자는 선의 가장 오른쪽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는 축구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어 보였다.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2017년 4월 7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뒤 기쁨을 나누고 있다./이석우 기자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2018) 얘기다. 책은 오랫동안 즐거이 축구를 관전해온 좋은 팬이 여자축구팀에 들어가 열정적으로 축구에 빠져드는 이야기다. 축구가 본업이 아니다. 그래서 김혼비의 열정은 더 순수하다. 이 책은 재미에 관한 이야기다.
축구에 빠진 40~50대 언니들
뙤약볕에 쭈그리고 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쳐다보고, 문방구 앞 오락기계에 정신이 팔려 집에 늦게 들어가 혼이 나던 어린 시절, 세상은 재미있는 일들 투성이였다. 학교를 다니고 생업에 뛰어들면서 호기심과 에너지는 차츰 말라갔다. 인간을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존재로 바라보자면 놀이를 잃었다. 세상이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취미에 대해 생각한다. 10대나 20대라면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재미를 느끼고 소질을 발견해서 생업을 찾을 수도 있다. 특정 취미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이란 일본어 ‘오타쿠’에서 온 ‘덕질’이 직업으로 연결되는 ‘덕업일치’인 셈이다. 오십의 취미는 다르다. 전적으로 재미를 붙이는 일이고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친구들에게 “뭘 하고 노느냐”고 더러 물어본다. 여행, 등산, 골프, 붓글씨, 탁구, 목공, 주말농장, 경비행기 날리기, 달리기 등 취미는 다양하다. 바쁜 직장이라 새벽에 등산을 갔다 이른 출근을 하는 친구도 있고, 마라톤 출전을 위해 열심히 몸을 만드는 친구도 있고, 여러 취미를 섭렵해온 취미의 고수도 있다. 취미를 즐기는 것은 생업의 분주함과 무관하게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보였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행복하려면 폭넓은 관심을 가지라고 권유한다. 러셀은 폭넓은 관심사가 긴장을 이완시키고 지나친 몰입으로 잃기 쉬운 균형감각을 유지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올바른 기분전환 방법을 갖고 있는 게 행복해지는 데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제 와 보니 러셀의 조언은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뭘 하고 놀까.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잃어버린 호기심과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란 제목에 끌려 읽게 된 것도 결국 남들은 무엇을 하고 노는지 궁금해서였다.
김혼비는 운동을 좋아했고 잘했다. 이 ‘체육소녀’는 호날두와 해외축구, K리그를 보는 열혈 축구팬이 됐다. 여자축구팀 회원 모집 공고를 발견하지만 축구가 팀 스포츠라는 것 때문에 망설였다. 그런데 결정은 간단했다. “나는 정말 축구를 하고 싶었다”가 모든 일의 중심이 됐다.
축구 이야기라고 해서 무턱대고 젊은 여자들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소 부러운 마음으로 21세기의 젊은 여자들은 어떻게 노는지 보려 했다. 30대인 김혼비는 물론 나보다 훨씬 젊다. 하지만 내 시야에 걸린 건 그 전부터 축구를 하던 40~50대 ‘언니들’이었다.
민음사
여자축구팀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준 김혼비가 아니었으면 이런 언니들이 있는지 모를 뻔했다. 세상이 변해서 여자들도 축구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축구를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프로나 아마추어 출신 선수들과 섞여 한국의 보통 언니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12년간 공교육을 받는 동안 축구를 해본 적이 없다. 교육기간 내내 축구를 접할 기회는 없었고 운동 자체에서 멀어졌다. 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들은 김혼비와 달리 프로 축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축구에 관한 대단한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다단계’ 같다는 표현처럼 어쩌다 알음알음으로 팀에 합류했다. 애정은 오히려 축구를 하면서 생겼다. 언니들은 왜 이제야 축구를 하게 됐냐고 하면서 땀을 흘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장애물이 왜 없었겠는가. 축구는 여성친화적인 문화와 거리가 멀었다. 축구를 하는 여자를 신기해하는 일상적 시선에 맞서고, 저자가 ‘맨스플레인’으로 지적하고 있듯 걸핏하면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 축구를 해야 했다.
생활의 문제도 있다. 아마추어 여자축구팀에 40~50대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은 출산과 육아가 집중된 30대가 빠졌기 때문이었다. 운동장 안의 세계는 밖의 세상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20세기에 젊은 여자였던 언니들은 축구를 하면서 21세기를 살고 있었다. 재미는 많은 것을 이긴다.
나이가 들어도 세상은 언제나 처음
일상으로 들어온 축구는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김혼비는 30대에 크게 아프면서 아름다움을 위해 체중과 씨름하던 지난날을 돌아봤다. 하지만 몸과의 관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관계는 축구를 하면서 바뀌었다. 이제 김혼비는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축구를 잘할 수 있는 몸을 원한다. “어떤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건 공포가 아니고 그보다 더 강렬한 다른 욕망이었다.” 다리엔 알이 벴고 긴 머리는 짧게 잘랐다.
재미는 공짜가 아니다. 폭넓은 관심사를 가져야 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배우고 익혀야 한다. 호기심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다 같이 즐길 이들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김혼비가 여자축구 경기를 처음으로 관전하던 날, 비인기 종목인 만큼 관중석에는 주로 전·현직 축구선수들이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하자 경기보다도 부상선수에 대한 걱정으로 주변이 술렁댔다. “우리 여기 다 있다.” 들것에 실린 선수가 가까이 오자 관중석에선 열렬한 응원의 외침이 터졌다. 그들에게 선수의 부상은 정말로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 뜨끈뜨끈한 외침에 읽던 나도 울컥했다.
근육을 붙이고 체력을 키우며 언니들과 오래오래 운동장을 뛰어다닐 김혼비를 생각하면 내 일이 아니라도 뿌듯하다. 오늘도 어디선가 뛰고 있을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축구뿐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재미있는 걸 찾아내 즐기고 있을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잃어버린 재미를 찾아 나서는 나 같은 사람들은 앞서 즐기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기 때문이다.
재미는 힘이 세다. 오랫동안 혼자가 편한 사람이어서 축구팀에 들어가기 꺼렸던 김혼비는 이제 언니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축구를 시작하기 전엔 스스로도 알 수 없던 일이다. 내가 몰라서 못찾은 재미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도 재미를 느낀다면 세상은 언제나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