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에 빠진 아이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사랑을 찾아야
이수련 정신분석학 박사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어른입니까. 올바른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박사는 프랑스에서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다수의 프랑스 아동청소년 병원과 메디컬 심리센터에서 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어른인가’를 스스로 질문해볼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은 짧지만 강렬한 감동을 주는 소설입니다. 가난한 유대인 의사의 아들이었던 한스와 부유한 독일 귀족가문 출신인 콘라딘은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나치즘이 도래하면서 헤어지게 되지요. 마지막에 반전과도 같은 결말을 접한 뒤에는 두 어린아이들의 깨져버린 우정의 장면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환경이 다른 집안의 아이들은 어떻게 친한 친구가 되었을까요? 그 비법은 콘라딘에게 반해버린 한스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봐주는 것이었지요.
“월장석처럼 은은한 무지갯빛에 단백석처럼 광택이 나는 시리아의 유리그릇, 유백에 연녹색인 비취 빛깔의 로마시대 꽃병, 그리고 그리스 시대의 조그만 헤라클레스 청동상, 내게 자기의 수집품들을 보여줄 수 있고 내 놀라움과 찬탄을 지켜볼 수 있어서 기뻐하는 그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작품은 오래전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로 어린아이들이 자기 장난감을 보여주면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지요. 어린아이들은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손을 끌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 자기 장난감들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러워합니다. 어른들이라면 아이의 기대감에 부응하려고 “와~ 멋지다”를 연발하겠지요. 또래 친구라면 진짜 부러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급생>의 콘라딘처럼 기뻐하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장난감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재밌게 노는 것은 이해할 만한데, 왜 그것을 남한테 보여주려고 하고,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하는 걸까요?
엄마의 사랑을 대신하는 ‘중간대상’
우리는 그 해답의 힌트를 위니캇이라는 영국 정신분석가의 ‘중간대상(transitional object)’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중간대상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끌고 다니는 담요 같은 것입니다. 항상 옆에 있어 주던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엄마 냄새가 나는’, ‘엄마가 준’ 물건을 말합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완벽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엄마 품에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불안해집니다. 곧바로 처절한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하지만 중간대상이 생기면 아이는 엄마 없이도 불안을 버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엄마의 사랑을 대신해서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간’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그것은 엄마의 사랑을 대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요컨대 엄마의 사랑을 담은 자신의 소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대상을 가진 아이는 엄마 품속에 있는 것처럼 당당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중간대상이 다른 물건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것들이 장난감입니다. 아이들의 완벽함, 당당함, 자랑스러움의 근원은 엄마의 사랑, 중간대상, 장난감으로 경로를 거칩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성장하면서 그 다음 단계는 무엇이 될까요? 장난감의 다음 말입니다.
성인이 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죠. 나는 내 완벽함, 당당함, 자랑스러움이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믿고 있는지. 혹시 여전히 장난감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장난감을 손에 쥐고 다니는 아이, 장난감을 보관해둔 아이, 장난감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아이. 우리는 여전히 이런 아이일 뿐인 것은 아닐까요?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만, 소유해야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성인이라면 장난감에 집착하는 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아이들의 레고 블록, 온갖 종류의 인형들, 장난감 자동차들, 공룡들, 변신 로봇들을. 일정한 숫자를 지정해 그 소유목록을 완성시키는 장난감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무한대를 향해 늘어나게 되어 있지요. 사실, 그것이 애초에 대신했던 것은 내가 울면 와주고, 부르면 대답해주던 내 옆에 있어 준 엄마, 나의 부족함을 버텨준 엄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중간대상에서 장난감으로 넘어가면서 혼선이 생긴 겁니다. 중간대상이 가치가 있었던 건 그것이 엄마의 사랑을 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갖고 다니다 보니까, 무엇이든 내 것이 생기면 그것으로 족한 것으로 속아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일 뿐입니다. 무언가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당당해질 수 없지요. 무언가를 ‘정말 많이’ 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성인이 되는 방법은
장난감 덕분에 당당했던 아이가 다른 것들을 수없이 소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도 가져보고, 저것도 가져봤지만 결국 그런 소유는 나를 진짜로 채우지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오랜 시간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똑같은 경험을 하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문제가 아닐까요. 성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장난감의 후속품들(자랑할 만한 소유물들)이 자신을 채워준다고 믿는다면, 아무리 지식과 경험을 쌓아도 결국 어릴 때 부딪혔던 똑같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게 됩니다. 수백만 원어치의 레고를 사서 방을 채워 놓아도 나는 여전히 레고가 별로 없는 아이일 뿐이라는 난관 말이죠.
아이가 성인이 되면서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엄마에게서 얻던 것을 더 이상 엄마에게서 얻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주던 것을 이제는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성인입니다. 엄마에게서 얻던 것, 그건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 그리고 사랑입니다. 성인이 되면 나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나를 채워서 당당하게 만들어줄 것이 있다면, 이 두 가지입니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해서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그와 더불어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중간대상에서 장난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속아 자랑할 만한 것을 소유하는 데 끝없이 힘을 쏟다보면 정작 진짜로 당당해지는 법을 잊고 말지요. 엄마는 아무것도 없는 연약한 나를 바라봐주고, 말 걸어주고, 옆에서 기다려준 사람입니다. 사랑의 참의미는 그것이지요.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버텨내주는 것.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로 내가 당당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장난감을 움켜쥐고, 또 다른 장난감을 찾아다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진짜 성인이 되는 방법은 그런 사람들과의 인연과 만남, 그리고 지속적인 관계를 지키려는 바람과 노력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