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 창작의욕을 꺾는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도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며 가슴 두근거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반응한다. 그들의 가슴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모든 예술 장르에는 나름의 비평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작품에 날개를 달아주기도 하지만 가혹한 평으로 날개를 꺾기도 한다. 예술인이 세상에 이름을 얻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다. 대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처럼 인맥과 지연, 학연 등이 얽히고설킨 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끼리끼리 알아서 챙기고 공생하는 풍토는 결국 줄 없고 연고 없는 예술인들에게는 절망을 안겨준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짧은 소설 <깊이에의 강요>는 비평가들의 무책임한 평론이 예술인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는지 생생하게 전해준다. 짧은 소설을 더 짧게 추려 본다.
재능이 뛰어나고 출중한 미모를 지닌 여류화가가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자 어느 평론가가 ‘그녀 작품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고 비평을 썼다. 여류화가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세밀하게 뜯어봤다. 그리고 깊이라는 것을 끝없이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덩달아 비평에 동조했다. “맞아, 그녀 작품은 나쁘지는 않은데 깊이가 없다.”
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품고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정말 깊이가 없을까”란 스스로에게의 물음은 이내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라는 체념으로 바뀌었다. 젊은 화가는 점점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영육(靈肉)이 피폐해갔다. 알코올과 약물 복용으로 빠르게 늙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바람 부는 날, 텔레비전 송신탑에 올라가 뛰어내렸다. 화가는 전나무 숲속에 떨어져 즉사했다. 그러자 대중지 기자들이 몰려가 그의 죽음과 주검을 샅샅이 살폈다. 그녀에게 깊이가 없다던 평론가는 그의 치열한 삶과 작품에 깊이 있음을 예찬했다.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 집요하게 파고듦…,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여류화가는 죽어서야 그렇게 잠깐 각광을 받았다.
김택근
한 예술인이 ‘깊이가 없는 평론에 상처를 입고, 깊이를 고민하다, 깊이를 찾아 번민하고, 그 깊이에 가위눌려, 깊이 속에 침몰하는’ 과정을 그렸다. 말과 글의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또 여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형성되어 유포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참으로 통렬한 풍자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일은 무수히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 분야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의 말과 글은 그것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생산되었다고 해도 곧 여론으로 둔갑한다. 그 여론은 검증을 받지 않고 유통된다. 그렇다면 그 권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추종자들의 떠받침에서 나온다. 그래서 대가(大家)들의 권력 남용은 그 배후를 따져보면 집단의 횡포나 다름없다. “사람은 좋은데 작품은 좀 그렇네.” “기교는 좋은데 뼈대가 약해.” “그런대로 흉내는 냈는데 치열함이 없구먼.”
비평이 창작의욕을 꺾는 흉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도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며 가슴 두근거리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반응한다. 그들의 가슴과 영혼에 상처를 주지 말라. 모든 창작은 설렘에서 비롯된다. 부디 평하기 전에 오래 보라. 그리고 오래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