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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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입력 2019.06.28 15:26

  • 박병률 경제부 기자

한글사전은 우리 언어생활의 ‘기초자산’

첫 작업에 나선 지 46년 만에, 1권이 나온지 10년 만에 6권이 완간된 책이 있다. 그냥 오래만 걸린 게 아니다. 책을 만든다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죽음까지 당했다. 원고는 사라졌다. 내나라가 없던 탓이다. 기적적으로 주권을 되찾았고 원고도 발견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급한대로 땅에 파묻고 훗날을 기약했다. 종전이 됐다. 이젠 돈이 없다. 돈 많은 나라 민간재단의 원조를 받아서야 책이 완성됐다. 이 책은 <조선말 큰사전>이다.

는 엄유나가 감독을 맡고, 유해진, 윤계상이 주연한 2019년 한국 영화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다 탄압당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다./롯데엔터테인먼트

<말모이>는 엄유나가 감독을 맡고, 유해진, 윤계상이 주연한 2019년 한국 영화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다 탄압당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다./롯데엔터테인먼트

엄유나 감독의 <말모이>는 일제 식민지 시대 한글사전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한 나라다. 한국어는 현존하는 3000개의 언어 중 고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단 20여개의 언어 중 하나다’라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은 묵직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실화와 허구를 넘나든다. 배경은 일제가 한글 말살정책을 펴던 1940년대 경성이다. 극장에서 해고돼 일자리를 잃은 판수는 아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행인의 가방을 훔친다. 그러나 실패. 소개를 받아 면접을 보러간 곳이 조선어학회다. 알고보니 대표는 자신이 가방을 훔쳤던 행인, 정환이다. 정환의 눈에 소매치기에다 까막눈인 판수가 탐탁할 리 없다. 하지만 특유의 붙임성으로 판수는 회원들의 호감을 얻는다. 정환은 고용조건을 건다. 한 달 안에 한글을 배우라는 것. 난생처음 글을 읽게 된 판수는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을 뜬다.

금융시장에 빗대자면 한글사전은 언어생활의 ‘기초자산’이다. 기초자산이란 파생상품의 근거가 되는 자산을 말한다. 농축산물, 원유, 금 등 실물상품과 주식, 금리, 통화 등 금융상품이 있다. 사전이 우리말글의 기초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표준어를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고추장, 꼬치장, 꼬추장, 고치장, 꼬장, 땡추장 등 8도가 제각기 다른 단어를 쓰게 해서는 기초자산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전국의 국어교사가 모여 공청회를 열고 사전에 기재할 표준어를 확정했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에서 갈라져 나와서 생긴 상품으로 선물, 옵션, 스와프 등이 있다. 즉 삼성전자의 주식이 기초자산이라면 삼성전자 주식선물 또는 주식옵션은 파생상품이 된다. 사전이 한글의 기초자산이라면 단어와 문장을 이어 스토리를 만든 책, 소설, 영화 등은 한글의 파생상품이 되는 셈이다.

파생상품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보유자산에 대한 위험헤지다. 시장에서 가격이 널뛰다 보니 상품은 언제나 가격변동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보험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파생상품을 포트폴리오 보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 금융시장에서 파생상품은 큰 수익을 얻기 위한 투기상품이 된다. 기초자산은 가격이 폭락하면 투자한 만큼만 잃는다. 하지만 파생상품은 원금뿐 아니라 그 이상의 손실을 볼 수도 있다. 투자금액에 비해 이익과 손실이 크게 나는 것을 ‘레버리지 효과’라고 부른다. 레버리지란 지렛대를 의미하는 레버(Lever)에서 파생된 말이다. 적은 힘을 가지고도 지렛대를 이용하면 큰 힘의 효과를 내듯 파생상품은 원금의 몇십 배 되는 수익과 손실을 볼 수 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영화 속 정환의 대사는 조선어학회 대표였던 이극로의 말이다. 말과 글은 레버리지 효과를 일으켜 민족의 정신과 생명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을 선각자들은 알고 있었다. 무장투쟁만큼이나 말글을 지키려 했던 한글학자들의 독립투쟁이 중요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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