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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무서워졌다

입력 2019.06.21 15:14

  • 김택근 시인·작가

은행들에게 개인이 쌓은 신용은 하찮은 것이다. 개미들은 그저 개미일 뿐이다. 개미들과의 유대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미들만 믿은 만큼 실망할 뿐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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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새문안로에 있는 하나은행(합병 전에는 외환은행) 지점은 ‘나와 우리 가족의 은행’이었다. 월급이 그 은행 통장으로 들어왔고, 그 은행 신용카드를 썼고, 그 은행에서만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30년 넘도록 그 은행만을 들락거렸다. 멀리 간판만 보여도 반가웠다.

퇴직을 하자(고정수입이 없어지자) 그런 은행이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뀌었다. 얼마 전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마이너스통장 기간이 곧 만료되지만 더는 연장해 줄 수 없다는 통보였다. 이것저것을 따졌지만 직장이 없으니 규정상 연장이 어렵다고 했다. 30년 넘게 거래를 했고, 지금도 연금이 하나은행 통장으로 들어오고, 대출금을 꼬박꼬박 갚아나가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해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한 번도 연체를 한 적이 없었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실망을 넘어 배신감이 들었다.

“도대체 30년 넘게 쌓아온 내 신용은 어디로 간 것이오?”

돌아온 대답은 내규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투가 사무적이고 차분했다. 짐작컨대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이것이 은행의 본래 얼굴이었다. 은행들은 편하게 앉아서 이자놀이에 골몰하고 있다. 은행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고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돈이 없으면 은행 문턱은 한없이 높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매몰차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고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이나 사채를 찾아 발길을 돌려야 한다.

새삼 인도 그라민 은행의 ‘배려와 공존’이 떠올랐다. 창업자 무하마드 유누스는 가난한 사람끼리 서로 등을 두드려 주는 ‘그라민 방식’을 찾아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린 뒤 얹어준 이자가 다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으로 흘러들어가 돈이 제대로 도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었다.

“일반 은행들이 이것 따지고 저것 따져 보증과 담보를 요구한 뒤 대출을 해준다. 그리고 돈을 빌려간 사람이 꼬박꼬박 이자를 내거나 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한 그 사람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정반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용대출을 해 준 뒤부터 본격적으로 관계를 쌓아간다. (……) 그라민 은행은 직원들이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내규로 금하고 있다. 신입 직원들은 그런 황당한 내규에 대해 ‘그럼, 도대체 어디에 가 있으란 말이냐?’ 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유누스는 ‘어디든 가 있어야 한다. 나무 밑에서 잠을 자든, 찻집에서 잡담을 하든, 어쨌든 사무실에 있으면 안 된다. 여러분의 월급은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때문에 받는 것이다’라고 답한다고 한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이 은행으로 찾아오게 하는 게 아니라 은행이 사람들을 찾아간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유병선 <보노보 혁명>)

김택근

김택근

한국의 은행들에게 개인이 쌓은 신용은 하찮은 것이다. 개미들은 그저 개미일 뿐이다. 개미들과의 유대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미들만 믿은 만큼 실망할 뿐이다. 현실만을, 돈만을 좇는다. 은행 종사자들은 관여하면 피곤해지고 사고 나면 책임져야 할테니 그저 앉아서 고객들의 돈과 자산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뿐이다. 이 땅의 은행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설 때는 언제일까. 갑자기 은행이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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