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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등장과 바둑 삼국지

입력 2019.05.20 11:16

  • 김택근 시인·작가

AI는 삽시간에 바둑계를 접수하고 인간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제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인간들을 제쳐놓고 저희끼리 대회를 열고 있다.

프로기사 신진서 9단과 바둑 AI 한돌이 대국을 하고 있다./경향 DB

프로기사 신진서 9단과 바둑 AI 한돌이 대국을 하고 있다./경향 DB

1989년 9월 싱가포르에서는 바둑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가 펼쳐졌다. 바둑 올림픽이라 불린 제1회 응씨배 결승국. 최후의 장수는 한국의 조훈현과 중국의 녜웨이핑이었다. 5번기 승부에서 2승2패, 마지막 한 판만이 남아있었다. 창은 날카롭고 방패는 견고하니 승부는 하늘만이 알고 있었다. 조훈현의 ‘부드러운 창’이 ‘철(鐵)의 수문장’을 베었다. 반도는 열광했고, 대륙은 탄식에 잠겼다.

그 무렵 일본 바둑은 수직으로 추락했다. 일본은 기리(棋理)와 모양을 따지고 도와 예를 중시했던 바둑의 나라였다. 일본 최고수의 기보는 한국과 중국의 기사들에게는 교본이었다. 바둑에 관한 격언과 전설, 그리고 속설까지 모두 일제(日製)였다. 그러던 일본이 호흡이 거친 전투바둑에서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전투에 강한 한국 기사들은 승승장구했다. 한국 바둑은 한동안 세계를 호령했다. 중국 기사들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창호를 신처럼 받들며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기사가 세계대회를 제패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이변이 거듭되면 불변이었다. 대륙 곳곳에서 범상치 않은 영재들이 출현해 한국을 압도했다. 숱한 대륙의 별들이 떠올랐다.

그대로 중국 천하가 되는가 싶더니 다시 한국 바둑이 꿈틀거렸다. 이세돌에 이어 박정환 같은 몇몇 천재들이 나타나 대륙의 기사들에게 일격을 가했다. 요즘은 서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지만 몇 명의 장수에게만 의존하는 한국이 중국에 역부족인 양상이다. 또 특기할 일은 그동안 바닥을 기었던 일본의 부상이다. 출중한 신인들의 출현으로 서서히 옛날의 기력을 회복하고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기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넘어갔다면 언젠가는 일본으로도 건너갈 것이다.

이러한 ‘바둑 삼국지’에 변수가 생겼다. 바로 인공지능(AI)의 등장이다. AI는 삽시간에 바둑계를 접수하고 인간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제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인간들을 제쳐놓고 저희끼리 대회를 열고 있다. 중국의 줴이와 골락시, 한국의 한돌과 바둑이, 일본의 AQZ 등이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초창기 절대강자였던 알파고가 퇴장하고 후속 AI들이 속속 출현해 춘추전국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미 절세의 고수들이 AI에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한 바 있다. 지금 프로기사들은 그토록 신봉했던 바둑의 정석들을 버리고 인공지능이 제시한 기보를 외우며 AI를 섬기고 있다.

김택근

김택근

AI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고 수준의 여류기사 4명이 중국의 AI 골락시에게 2점을 놓고도 모두 패했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국할 때 ‘신의 한수’로 한 판을 이겼지만 그마저도 앞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AI에 맞서겠다는 생각 자체가 불경이다.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며 추앙받던 전설적인 인물들도 초라해졌다.

요즘 연구생들은 바둑도장에 나가기보다는 AI에 배운다. 결국 AI가 제자들을 거느리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바둑은 오로지 전투에만 골몰하는 싸움판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바둑계가 프로기사들을 ‘선수’로 호칭하는 것부터가 하나의 상징처럼 보인다. 한·중·일의 바둑 삼국지는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까. 최강의 AI를 ‘모시고 있는’ 나라가 다시 패권을 움켜쥘지도 모른다.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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