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나라에서는 ‘외국인의 증언’은 당연히 필요 없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다시 외국인의 증언으로 진실을 밝혀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제암리 교회 발굴 현장./경향DB
나라를 잃었어도 봄은 찾아왔다. 남쪽에서 올라온 바람은 언 땅을 녹이고, 서울에서 내려온 3·1 만세 소리는 언 가슴을 녹였다. 100년 전 이 땅의 백성들은 민족의 앞날에도 봄이 올 것으로 믿었다. 그해 봄은 온누리가 만세 소리로 뒤덮였다.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 일본 군인과 헌병들이 나타났다. 저들은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교회로 모이라 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교회 문턱을 넘었다. 모두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교회는 회개하고 기도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손을 잡았다.
그때였다. 왜놈들이 갑자기 교회 문을 잠갔다. 저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출구는 없었다. 아기를 품은 엄마가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엄마의 절규에도 총알이 박혔다. 그렇게 23명이 숨졌다. 왜놈들은 교회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불태웠다. 시커먼 불길이 들녘을 삼켰다. 이른바 제암리 학살이다.
이 학살극은 시골 마을의 작은 소요 정도로 묻힐 뻔했다. 하지만 만행의 현장을 찾아간 푸른 눈이 있었다. 바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였다.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상세하게 취재하여 세계에 알렸다. 또 불타버린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제암리 인근의 발안 공동묘지에 묻었다. 그는 결국 강제로 추방당했지만 캐나다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광복 이후에도 줄기차게 그날을 증언했다.
해방된 나라에서는 ‘외국인의 증언’은 당연히 필요 없어야 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다시 외국인의 증언으로 진실을 밝혀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부독재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총으로 권력을 찬탈한 군부세력은 무장군인들을 투입했다. 시민을 향해 저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시민들이 부른 애국가에도 총알이 박혔다. 군사정권은 의로운 시민항쟁을 북한 소행으로 몰아가며 진실을 은폐했다. 광주는 외딴섬이었다.
이때 만행의 현장을 지켜본 푸른 눈이 있었다. 바로 미국인 목사였다.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아널드 피터슨, 광주 참상을 해외 언론에 알린 찰스 베츠 헌틀리가 그들이다. 두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광주에서 함께 현장을 목격했던 부인들이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최근 일부 극우세력이 북한 개입설을 퍼뜨리고 여기에 의원 3명이 동조하자 다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국회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당시를 뜨겁게 증언했다.
김택근
“우리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다. 최근 홀로코스트(집단학살)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는 역사의 진실을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역사적 진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이들의 증언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여전히 외국인의 증언으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현실이 얼마나 비통한가. 5·18의 실체를 알고 있는 ‘검은 눈’들은 수없이 많을 테지만 그들은 진실을 비틀거나 그저 침묵하고만 있다. 비겁하고 추악하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도 내년이면 40년이 된다. 하지만 봄이면 여전히 아프다. 우리는 이러한 야만의 시대를 언제 완전히 건너갈 수 있는가. 진실이 꽃을 피우는 맑은 봄날을 언제 맞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