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지 않다. 한반도의 승자 신라와 중국 대륙의 승자 당은 패자의 역사를 남겨놓는 데 인색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위대했다는 데 토를 달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수와 당에 맞서 수차례 승리를 거둔 동북아 강국이었다. 안시성 전투는 그 중 하나다. 얼마나 극적이고 통쾌한 전투였던지 공식적인 기록 없이 입에서 입을 거쳐 1000년 동안 구전돼 왔다. 조선후기 문신인 송준길은 <경연일기>(1699)에서 “현종이 안시성주의 이름이 누구냐고 묻자 송준길이 답하기를 양만춘이며 이세민의 군대를 맞이해 능히 막아냈다. 옛날 부원군 윤근수가 중국에서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고 적었다.
김광식 감독의 <안시성>은 서기 645년의 안시성과 양만춘을 되살려놨다. 남아있는 단 3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영화 <안시성>은 ‘역사’의 복원이라기보다 ‘스토리’의 복원에 가깝다. 5000명으로 20만명의 공격을 88일간 막아냈다는 설정도 영화적 상상력이 많이 가미됐다.
당 태종 이세민과의 일전을 앞둔 안시성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유오성 분)이 왕을 죽이고 대막리지가 돼 전권을 잡았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소집에 응하지 않은 안시성을 반역의 땅으로 규정했다.
이세민은 왕을 내몬 연개소문을 친다는 명분으로 안시성을 공격한다. 20만 대군은 투석기, 공성탑, 운제 등 성을 단번에 박살낼 만한 엄청난 무기들로 무장돼 있다. 기가 질린 안시성 주민들에게 양만춘이 외친다. “어떤 놈이 내 소중한 것을 짓밟고 빼앗으려 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고립무원인 안시성의 상황은 ‘칵테일 위기’라 할 만하다. 칵테일 위기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악재들이 뒤섞여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다양한 술을 혼합해 마시는 칵테일처럼 다양한 위기가 뒤섞여서 밀려올 때 쓰는 용어다. 조지 오스본 영국 재무장관은 201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위험한 칵테일 위기(Dangerous Cocktail Threat)가 다가오고 있다”며 며 글로벌 경제상황을 우려했다. 당시 중국 증시 폭락, 미국 금리인상,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교단절,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등이 동시에 터지며 신년 글로벌 경제가 위축됐다.
안시성은 중앙정부인 고구려의 도움은커녕 밀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도움을 청할 주변 성들은 이미 무너졌다. 성은 좁고 전투병은 많지 않다. 고구려 신녀는 고구려의 멸망을 점친다. 어느 것 하나 좋은 게 없는 상황. 하지만 안시성은 기적적 승리를 거둔다. 그 배경은 철저한 사전대비와 내부단결에 있었다. 양만춘은 성을 튼튼히 쌓고 다양한 전술을 마련해 뒀다. 여기에 양만춘의 뛰어난 리더십과 성을 지키겠다는 주민들의 일치된 힘이 더해지면서 전쟁의 신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냈다.
미·중의 무역전쟁, 미국의 금리인상, 조선·자동차산업의 약세, 높은 수준의 가계부채, 최저임금과 주52시간제 도입에 따른 노동환경 변화 등이 뒤섞여 몰려들면서 한국 경제도 ‘칵테일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다행인 것은 많은 외환보유액, 계속되는 경상수지 흑자, 낮은 기업부채, 높은 국가신용등급 등으로 경제 펀더멘털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1997년, 2008년 두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도 혹 있을지 모를 위기에 대비해 사전준비를 충분히 해놨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금융당국의 리더십과 내부단결이다. 민·관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번 공성전은 승리로도, 패배로도 끝날 수 있다. 1000년 전 안시성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