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아니라 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완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성(性)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자꾸 눈물이 난다”는 고백을 하는 중년 남자들을 자주 만난다. 이들은 대개 “젊어서는 안 그랬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왜 이렇게 주책맞게 됐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워한다. 심지어는 혹시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
출처|픽사베이
남성이 정서적으로 변하는 것은 중년에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안심을 시킨 다음 요즘 사는 게 어떤지 물어보면 대개 “뭔가 허전하다” “요즘에는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다” “젊었을 때는 뭔가를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이제는 그렇게 미칠 것이 없다”는 등 뭔가 잃은 것 같고 살아야 할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서성이는 듯한 느낌을 말하곤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지금의 중년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남학교와 여학교가 분리되어 있었다. 마치 청소년기에 남녀를 함께 놓아두었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듯이 중·고등학교 생활지도부 교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있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비교적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교회를 예배당이 아니라 ‘연애당’이라고 반은 부러운 마음으로, 또 반은 비난하는 마음으로 비아냥대기도 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공간으로 남녀를 분리한 것만이 아니라 행동에서도 남녀의 차이를 강조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남자답다’는 것의 요체는 한마디로 ‘여자답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다운 행동을 하면 “계집애 같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유약하다”고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여자는 원래 약하기 때문에 당연히 남성은 ‘강해야’ 했다.
‘우는 것은 약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절대로 울면 안 된다고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여자의 유약함은 잘 우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남자애가 울면 “남자는 일생에 세 번밖에 울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거나 “울면 ○○가 떨어진다”는 위협적인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남자는 아무리 아프거나 슬프거나 힘들어도 ‘입을 꾹 다물고’ 참아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그 강도가 더 셀 뿐이지 사실 남자들에게 자연스런 정서적 표현을 억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직에 있거나 존경받는 인사가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약함’의 증표로 받아들여진다. 최근에 미국에서 연방대법원 판사로 지명된 브렛 캐버노가 청문회에서 눈물을 흘린 것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세간의 여론은 긴박한 상황에도 냉철한 이성을 견지해야 할 대법관으로서는 너무 정서적이고 유약한 것이 아니냐는 자질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처럼 남자들에게 속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금하다보니 병적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소위 ‘가면우울증’이라는 병명으로 나타나는 ‘가장된 우울증’이다. 가면우울증은 우울한 감정이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 우울증을 말한다. 가면우울증은 우울감과 무력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따위의 신체화 증상이나 지나친 명랑함, 약물이나 알코올중독, 도박, 행동과잉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중년 남자들에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은 ‘이제 솔직하게 살고 싶다’는 속마음의 표현이다. 이제는 남자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인정받기 위해 두렵고 힘들고 아픈 것을 감추고 강한 남성으로 살아오면서 억눌렀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인간선언’이다.
남자는 일생 동안 몇 번의 큰 변화를 겪으며 살아간다. 어릴 때는 사실 남자나 여자가 신체적인 면에서나 심리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즉, 어린이는 양성(兩性)적이다. 오히려 어릴수록 여자애들이 더 크고 더 강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자신의 성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변하기 시작한다. 신체적인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심리적으로도 더 이상 양성적이 아니다. 이제 청소년들은 이성(異性)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남자는 한 집안의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성품으로 교육받기 시작한다.
중년 남자들이여! 마음놓고 울자
가장으로서 남자는 무엇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생계에 필요한 경제적인 자원을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약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경쟁에서 낙오될 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남성다워야 하고 가장 강해야 한다. 자신 속에 있는 여성적인 특성은 강하게 억압시키고 오로지 남성적인 특성만을 부각하며 생활해야 한다.
중년이 되면 자녀들도 어느 정도 성장했고, 한 개인으로서 생활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속으로 억눌려 있던 여성적인 특성들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심리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던 남성적 경향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또 다른 본성인 여성적인 특징들에게로 재분배되기 시작한다. 또다시 이성의 시기를 넘어 양성의 시기로 돌아간다. 또다시 전인(全人)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반쪽만의 남자와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중년의 남자에게서 나타나는 진정한 ‘눈물’은 때로는 진한 감동을 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눈물로 성공한 경우다. 지금은 ‘노무현의 눈물’로 불리는 그 유명한 눈물은 2002년 대선 TV광고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려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중년 남자의 ‘눈물’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남자가 아니라 한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완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성(性)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함께 묻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년 부부 간의 관계도 더 이상 남자와 여자로 서로 대립적인 성역할의 관계가 아니라 이성(異性)을 포용하고 공통적인 양성의 특성을 함께 가꾸어나가는 친구이자 동지의 관계로 다시 재정립할 수 있다. 자신 속에 숨겨져 있던 이성의 특징이 표현되면서 남편이나 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오색 단풍이 우거진 가을 숲길을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는 편안한 중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중년 남자들이여! 마음놓고 울자. 그대의 진정한 눈물은 감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