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제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요. 자식이면 엄마 말을 들어야 하지 않나요? 전반적으로 그래요. 제가 다 저를 위해서 말하는 건데 자기를 사사건건 간섭한다고 느끼나 봐요. 기가 막혀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옛말이 딱 맞아요.”
붉으락푸르락 미영씨 얼굴이 일그러진다.
영화 ‘애자’의 한 장면 / 다음 영화
“저는 예전에 안 그랬는데 저희 딸은 저랑 얼마나 다른지 정말 미치겠어요. 요즘 딸과 매일 전쟁이에요.”
고운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 계속 한숨과 짜증이 묻어 나온다.
“어휴, 정말 속상하겠어요. 딸과 어떤 부분이 특히 힘든가요?”
두 딸을 키우는 미영씨는 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특히 큰딸을 위해선 자신의 모든 정성을 쏟으며 키웠다. 그런 자신의 열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공부면 공부, 리더십이면 리더십,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이 잘 자라줬다. 기숙학교에 다닐 때도 잘 적응하며 일류대학에 들어가 엄마에게 그간의 고생을 싹 날려준 딸이었다. 그래서 딸은 자신의 미래였고 대외적으론 자신의 자존심이었다.
엄마의 미래였고 자존심이었던 딸
“갈수록 제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요. 자식이면 엄마 말을 들어야 하지 않나요?”
“자식이 말 안 들으면 엄마로서 참 속상하지요. 그런데 주로 어떤 경우에 그런가요?”
“전반적으로 그래요. 내가 다 저를 위해서 말하는 건데 자기를 사사건건 간섭한다고 느끼나 봐요. 기가 막혀서….”
“억울했겠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뭐든 알아서 잘하니 대학 들어간 이후로 다른 얘기는 안 하고 밤에 위험하니 늦게 다니지 말라는 말만 했어요. 참, 내년이면 졸업반인데 이젠 아예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어요.”
미영씨는 뭐든 잘하는 딸을 믿었다. 그래서 오직 안전을 위해 일찍 들어오라는 주의만 했는데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몰라주고 이제는 엄마의 권위도 무시하니 서운하고 허무하단다.
“일류대학에 들어갔으면 좋은 친구들 많이 사귀고 공부도 열심히 할 줄 알았어요. 또 졸업할 때는 자격증도 여러 개 따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하며 멋지게 살 줄만 알았지요. 그래서 제 힘닿는 데까지 석사고 박사고 공부 뒷바라지 해주겠다고까지 했는데 매일 늦게 다니며 이것저것 하더니 최근엔 뜬금없이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거예요. 매일 연습한다고 밤늦게 다니며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으니 너무 속상해요.”
“딸이 어머니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겠다면 불안하고 걱정되지요. 배신감도 들고…. 그런데 혹시 딸의 평소 꿈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그럼요. 우리는 다른 집과 달라요. 서로 얘기를 많이 하는 사이예요. 저 역시 딸이 하고 싶은 것은 다 밀어줬어요. 다행히 딸에게 여러 재능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본인도 욕심이 많아 뭐든 하면 다 잘했고요. 그래도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죠.”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의 그림자
미영씨는 딸의 쾌활하고 활동적인 모습이 보기 좋았단다. 또한 딸의 다재다능한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딸에 대한 이런저런 꿈을 꿀 수 있었단다.
“어머니가 특별한 사랑을 쏟았고 딸과는 각별한 사이네요.”
“그럼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되고 막 혼란스러워요.”
“어떤 점이 혼란스럽나요?”
미영씨는 첫딸을 키우면서 다양한 꿈들을 몽실몽실 꾸곤 했다. 다행히 어릴 적부터 다재다능한 딸은 엄마의 꿈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딸의 의욕적인 모습과 드러난 결과를 보며 늘 힘이 났고 대견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혹시 안전한 길로 갈 수 있는 딸을 엄마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부추겨서 오히려 힘든 길을 가게 한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내 정성이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면 당황스럽지요. 더군다나 그것이 자식의 미래와 관련된다면 부모는 더 당혹스러울 거예요. 혹시 미영씨는 어릴 적에 부모님과 어떻게 지냈어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뗀다.
“그냥 착한 딸이었지요. 엄격한 부모였기에 순종하며 단조롭게 살았어요. 부모님도 저에게 큰 기대도 불만도 없었어요.”
“부모님과의 사이에 그런 자신의 모습이 지금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그녀가 바닥 저 끝을 응시한다. 골똘한 생각만큼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쓸쓸히 말한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요?”
“그런데 미영씨는 다른 집과 달리 딸을 특별히 마음껏 키우지 않았나요? 궁금하네요.”
“…….”
긴 침묵이 흘렀다.
침묵과 함께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마도 제 안에 어떤 답답함이 있었나 봐요. 사실 저는 제 꿈이 뭔지도 잘 모르고 묻혀 지냈어요. 그저 부모 밑에서 학교 다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산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그렇게 살았고요. 그게 지금 좀 슬프네요. 부모님의 말에 순종적인 소위 착한 아이였으니까요. 그래서 똑똑한 딸을 통해 뭔지도 모를 제 꿈들을 이루고 싶었나 봐요. 제 욕심이었네요.”
“글쎄요. 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어머니가 딸에게 실제로 다양한 꿈을 심어줬잖아요. 그건 스스로 대단하지 않은가요? 더군다나 열정과 똑똑함까지 물려줬으니 그 딸이 얼마나 풍성한 삶을 살겠어요. 혹시 제 얘기가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에 작은 여유가 감돈다.
“아마 지금은 딸이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시험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조만간 어머니가 물려주신 영민함을 발휘할 때가 올 거예요. 그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하나씩 분별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머님은 어떠세요? 어머님도 따님이 똑똑하다고 믿잖아요.”
“믿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되네요. 그래도 선생님, 걱정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네요.”
“그렇지요. 자식의 문제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부모는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며 자녀를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 딸에 대한 엄마의 걱정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모든 실체에 늘 그림자가 따르듯이 꿈을 향해 떠나는 그 길에도 걱정이라는 그림자가 언제나 따르지 않을까. 자녀가 자신이 하고 싶었지만 못한 것을 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사실은 그렇게 하도록 은연중에 부추기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두려워 못한 것을 자녀가 하니 두려움이 다시 되살아나 걱정이 커진다.
딸을 향한 엄마의 꿈이 이루지 못한 엄마의 그림자임을 깨닫고, 그것이 진정한 딸의 꿈으로 채워질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엄마에겐 필요하다. 부디 그림자보다 실체가 더 크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