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쟁투쟁의 최대 전과로 꼽힌다. 1920년 벌어진 봉오동 전투는 항일 무장투쟁에서 거둔 첫 승리였다. 3·1운동의 애국 열기를 재촉발시킨 의미 있는 대사건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장투쟁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싸움이었다. 독립신문은 1921년 2월 25일자에 상하이 임시정부 발표를 인용한 청산리 전투의 일본 측 피해가 전사자 1200여명, 부상자 200여명이라고 보도했다. 김좌진 장군부대(북로군정서)를 포위한 일본군을 급습해 거둔 성과였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었던 야스카와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는 독립군 부대를 막기에 어려웠다’는 기록을 남겼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우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이 있다. 그의 활약상은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장군’,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 등 수없이 많았다. 이 같은 별명은 1919년 홍범도 장군이 대한국민회의 후원을 받아 창설한 대한독립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홍범도 장군(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은 주로 ‘국내 진공작전’을 폈다. 국내 진공작전이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부대를 습격하는 유격전 전술이다. 대한독립군은 3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한반도에 2개 사단이 주둔하는 일본군과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em>홍 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1절)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4절)</em>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기념비적 전투였던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의 공로가 한동안 소거되고 없었다. 신백주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2016년 홍범도 장군 항일 무장투쟁을 다룬 한 TV프로그램에 출연, “역사학계에서 홍범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청산리 전투를 언급한 게 1980년대 후반”이라면서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으로 규정된 이유”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투를 이끈 영웅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로 간 뒤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게 원인일지 모른다. 물론 그는 연해주에서도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억할 가족이 없었던 것도 그를 잊게 한 이유였다. 부인 이옥녀는 홍범도 장군를 체포하기 위한 일본군 회유와 압력의 희생양이 됐다. 고문으로 옥사했다. 큰아들 양순은 바베기 전투에서 전사했다. 둘째아들 용환은 아버지 얼굴도 못본 채 병사했다. 거기다가 권위주의 시대에 판치던 ‘이념의 색안경’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2년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여운형 등과 함께 코민테른집행위원회(위원장 레닌)가 주최한 극동민족대회에 조선인민대표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사상과 이념을 넘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기록 없는 역사는 기억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한 것은 문학계였다. 20여년 동안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추적한 이동순 영남대 교수(국어국문학)가 그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정리하면서부터였다. 독립운동가 찾기를 평생의 업으로 여긴 곽영숙 여사의 노력도 한몫했다.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맞아 우정사업본부가 그를 다시 찾았다. 홍범도 장군 사진과 홍 장군이 이끌어 대승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를 기념한 봉오동 전투 전적비와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를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