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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주제 ‘리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변경)

입력 2018.09.17 14:24

  • 송진식 기자

화폐개혁과는 다른, 1만원이 10원이 되는 액면변경 논란

단순한 가정이다. 어제 1만원에 팔기에 망설이다 사지 않았던 화장품이 오늘은 10원이 됐다면 어떻게 할까. 대부분은 아마 ‘당연히 산다’일 것이다. 그럼 여기에 조건을 하나 달아보자. 1만원이 10원이 되기는 했는데, 값을 내린 게 아니라 단순히 화폐의 ‘단위’만 바꾼 것이라면 어떨까. 1만원과 10원이 동일한 가치의 화폐라는 얘기다. 그래도 왠지 ‘1만원’이라는 가격표보다는 ‘10원’이라는 가격표가 더 싸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럼 당신은 선뜻 지갑을 열게 될까.

1962년 단행된 화폐 액면변경 조치 당시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려는 인파가 은행 앞에 몰려 있다. / 국가기록원

1962년 단행된 화폐 액면변경 조치 당시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려는 인파가 은행 앞에 몰려 있다. / 국가기록원

한국은행 “액면변경, 화폐개혁과 혼동 말아야”

우리나라가 ‘리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변경)’을 단행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가정해본 모습이다. 액면변경은 우리 경제규모에 비해 원화의 화폐단위가 과도하게 크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1000달러는 112만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지만 국내에서 1000원으로는 요새 과자 한 봉지도 사기 어렵다. 액면변경의 필요성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제기됐음에도 찬반 논란이 팽팽히 맞서 아직까지 공론화를 거친 적은 한 번도 없다. 1만원이 10원이 되고, 1000원이 1원이 되는 시대가 오긴 올 것인가.

액면변경은 국내에서도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종종 언급되던 주제다.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의 사례로 회자됐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한 시민이 빵 하나를 사기 위해 지폐를 손수레로 산더미처럼 실어나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8월 20일 현행 볼리바르화를 10만대 1로 액면절하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부 수립 후 국내 액면변경이 시행된 사례는 두 번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3년, 사실상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이다. 목적은 사뭇 달랐다. 1953년의 액면변경은 한국전쟁 중 필요한 자금을 대기 위해 정부가 통화를 마구 찍어낸 게 계기가 됐다.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인플레이션 문제와 대외 통화가치 폭락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소할 목적으로 화폐 액면금액을 100대 1로 절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베네수엘라 사례와 일면 유사하다. 이때 화폐 단위도 당시 ‘원(圓)’에서 ‘환’으로 변경됐다.

1962년의 액면변경은 유통되지 않고 꽁꽁 숨겨져 있던 현금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이 같은 ‘퇴장자금’을 양성화해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투자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게 당시 정부의 계획이었다. 이때는 액면금액을 10대 1로 절하하는 동시에 화폐 단위를 다시 ‘환’에서 현재의 ‘원(WON)’으로 변경했다. 구권인 ‘환’을 유통금지시킨 조치도 포함됐다.

액면변경은 종종 ‘화폐개혁’이라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한다. 어감으로만 봐도 액면변경보다 화폐개혁이 더 광범위하고 변화의 강도가 높아 보인다. 이 때문에 한은은 액면변경과 화폐개혁을 따로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1950년의 경우 통용되던 100원권이 위조가 많아서 당시 정부가 기존 화폐를 유통정지시키고 새로 만든 화폐를 쓰도록 한 사례가 있다”며 “이 사례가 화폐개혁에 해당하는 것으로 단순한 액면변경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찬반논란 팽팽, 공론화조차 어려워

국내에서 가장 근래에 액면변경이 급물살을 탔던 시점은 2004년이었다. 당시 한국은행은 대규모 태스크포스팀을 꾸리고 액면변경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고, 해외 사례와 국내 현황 및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일정까지 담긴 ‘화폐제도 선진화 개혁안’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박승 전 한은 총재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개혁안은 화폐의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고 액면금액을 1000대 1로 절하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1만원은 10환이, 1000원은 1환이 된다. 1환은 다시 100전으로 나눌 수 있도록 한 방안도 포함됐다. 이 방안은 같은 해 당시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 동일하게 담겼다.

서울시내 한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에 가격표가 0자리를 제외한 숫자로만 표기돼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시내 한 커피전문점의 메뉴판에 가격표가 0자리를 제외한 숫자로만 표기돼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하지만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고 계획안으로만 남았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당시 기획재정부에서 한은의 일방적인 액면변경 추진에 반대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마련된 개혁안은 1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문서였다. 이 개혁안은 현재 어디에 있을까. 액면변경은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당시에도 극비로 분류됐고, 현재도 열람이 쉽지 않은 문서로 전해진다. 이에 대해 <주간경향>에 밝힌 한은의 공식 입장은 “해당 문서의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폐개혁이든 액면변경이든 국가의 화폐체계에 변화를 준다는 건 큰 모험이다. 최근의 베네수엘라나 과거의 터키 등 액면변경을 시도했던 국가들의 경우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라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유럽연합의 경우 경제통합과 함께 ‘유로’라는 단일 화폐를 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화폐체계에 변화를 줬다.

국내의 경우 액면변경을 시도한다면 두 사례의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평균 2.4%로 안정적이다. 2013년부터는 상승률이 1%대에 그치고 있어 일부 경제학자들은 “디플레이션이 우려된다”고 할 정도다. 이 때문에 액면변경에 부정적인 전문가들은 굳이 현 시점에 액면변경을 할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부정적 측면 크다” vs “정리할 때 됐다”

배영목 충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현금을 많이 쓰던 시절에는 액면 단위가 큰 원화체계가 불편함이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카드나 전자결제를 이용해 그런 불편함조차 거의 사라졌다”며 “액면변경을 통해 얻어질 효과도 불분명하고, 오히려 인플레이션 유발 등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밝혔다.

반면 액면변경을 통해 여러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2016년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614조7000억원(추정치)으로 액면변경을 했던 1962년(3658억원)보다 4414배나 커졌다”며 “경제규모에 맞게 거래단위의 편리성을 정리할 때가 됐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대외적으로도 세계 8위의 무역규모에 1달러당 1100원대의 환율은 너무 높다”며 “한국 원화 환율도 두 자릿수 이하로 내려 원화의 대외 위상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액면변경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시기적으로 현재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원화가 글로벌 기축통화들과 등가관계에 있도록 조정하는 게 옳은 방향인 건 맞다”면서도 “다만 물가가 안정돼 있을 때 시행을 해야 하는데 최근 부동산 가격 상승 등으로 물가가 오를 조짐이라 시기상으로 현재가 적절한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사안이 민감하다보니 한국은행은 액면변경에 대해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액면변경 논의는 국민적 공론화가 먼저”라는 입장이다. 액면변경으로 얻을 손익도 따져봐야 할 부분이다.

2004년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대표발의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서는 액면변경에 소요되는 총예산을 2조6700억원으로 추산했다. 전산 수정비용으로 1조3500억원, 화폐 제조에 8200억원, 현금입출기기 등 교체에 4400억원을 예상했다. 액면변경을 통한 이익으로는 향후 10년간 수표비용 절감 6조원 등 8조6000억원을 예상했다.

“액면변경으로 지하경제 양성화 가능”

사진|최운열 의원실

사진|최운열 의원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도입 필요성 역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출신인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국회 정무위)은 액면변경의 필요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역설하는 정치인이다. 최 의원은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시장은 한참 앞서갔다.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액면변경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 의원은 “지금 커피전문점이나 주요 식당 등에 가보면 상당수가 가격을 표시할 때 뒤의 0자리 세 개는 빼고 표기하고 있다”며 “굳이 법을 개정해 시행할 필요도 없이 정부에 의지가 있다면 한국은행이 즉시 시행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최 의원은 액면변경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효과로 지하경제의 양성화 문제를 들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지하경제란 국가 규제나 세금 부과 등을 피할 목적으로 조성되는 숨어 있는 돈이다. 예컨대 뇌물이나 도박 등 불법적인 과정을 거쳐 조성된 자금 등이 이에 해당된다. 국내 5만원권 화폐의 경우 발행총액이 전체 통화의 77%를 차지하지만 2016년 기준 5만원권의 회수율은 2016년 기준 50%에 못미친다. 5만원권 중 절반은 어디엔가 잠들어 있다는 뜻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걸어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최 의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지하경제 규모를 보면 통상 GDP의 10% 수준인데 대한민국은 지하경제 규모가 GDP의 25~3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며 “금액으로 따지면 300조원이 넘는 돈이 세금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과거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국회에서 발의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에서는 액면변경을 시행할 경우 법 시행 후 1년까지는 원화와 환화를 병행 사용토록 했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후 10년까지는 원화의 병행 사용은 되지 않되 금융기관에서 원화를 환화로 교환해주도록 했다. 이 법안에 따르자면 액면변경 시행 후 적어도 11년 이내에 지하경제에 묻혀 있는 돈들을 새 화폐로 교환해야 하는 셈이다.

최 의원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숨은 돈이 드러나고, 이에 대한 세금 부과도 가능하다고 전망하고 있다. 최 의원은 “300조원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OECD 수준으로만 지하경제 규모가 줄어도 200조원가량이 양성화되는 것”이라며 “여기에 평균 세율 20%만 부과해도 20조원의 세수가 발생한다. 이 정도 세원이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비용 과다지출 문제 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 의원은 다만 “액면변경의 이 같은 궁극적 효과가 일부 부유층이나 보수언론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어 제도 시행에 걸림돌이 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인플레이션 우려에 대해서도 최 의원은 “최근 물가상승이 1%대 미만에 머무르고 있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각에서는 사회적 혼란을 우려하지만 유럽의 경우 유로화로 개편할 때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 의원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달러당 환율이 1000 단위를 넘어가는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대한민국밖에 없다”며 “국격에 맞는 화폐단위가 필요하고, 정치권에서도 여야 가릴 것 없이 이에 동조하는 의원들이 많아 시점을 봐서 액면변경 문제를 공론화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액면변경하는 대통령은 역사에 기록될 것”

사진|정지윤 기자

사진|정지윤 기자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재직시절 추진하다 좌초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은행의 제22대 총재로 재직했던 박승 전 총재는 2010년 발간한 본인의 자서전인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를 통해 2004년에 화폐 액면변경을 추진했던 사실을 공개해 큰 화제를 모았다. 박 전 총재는 역대 한국은행 수장 중 액면변경 문제에 대해 재직 중에나 퇴직 후에나 변함없이 제도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 전 총재는 <주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액면변경은 가급적 빠를수록 좋다. 이걸 해내는 대통령은 역사에 남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서전에 따르면 박 전 총재는 2002년 취임하자마자 17명으로 구성된 ‘화폐제도개혁추진팀’을 구성한다. 이 팀은 1년간 방대한 연구를 거쳐 2003년 7월 구체적인 실행계획 및 보완대책이 담긴 1094쪽 분량의 개혁안을 완성했다. 박 전 총재는 “청와대 보고 후 수락을 받으면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8년 1월 1일부로 시행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며 “시행하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개혁안은 결국 청와대의 승인을 받지 못해 좌초됐다. 박 전 총재는 “완성된 개혁안을 들고 총리와 부총리에게 보고한 후 협의도 했다”며 “하지만 청와대에서 나온 신호가 부정적이어서 더는 진행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박 전 총재는 “개혁안이 총리와 부총리 선까지만 전달됐기 때문에 노 대통령은 내용을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에 있긴 했지만 개혁안을 보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박 전 총재는 “당시 개혁안은 일부 자금을 동결조치했던 과거의 액면변경과는 다른 것이었다”면서도 “개혁안을 기재부에 보여주니 화폐개혁 문제라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고 회상했다.

액면변경 문제의 경우 참여정부 출범을 앞둔 2003년 2월 11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한 차례 도입 논의의 필요성이 언급된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자 인수위는 부랴부랴 “공식 논의가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박 전 총재가 액면변경을 추진한 게 노 전 대통령의 의중일 수도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이에 대해 박 전 총재는 “액면변경은 순전히 한국은행이 의지를 가지고 극비리에 추진한 것이지 노 전 대통령과는 무관하다”고 확인했다.

박 전 총재는 액면변경을 통해 경기부양의 효과도 불러올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박 전 총재는 “지금은 물가가 너무 안정돼서 물가관리 목표에 미달하는 상태”라며 “액면변경 자체만으로 전국의 자동입출금기기(ATM) 교환, 은행 전산시스템 개편 등 많은 신규투자와 수요를 불러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경기진작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박 전 총재는 “사실 액면변경 문제는 긴급한 일이 아니다보니 미뤄도 된다. 그래서 역대 정권들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라며 “지금 시점은 경제가 많이 어렵고 하니까 당장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겠지만 언제든지 꼭 해야 할 일이다. 빠를수록 국가적인 비용도 적게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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