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누군가 함께라면 더 기쁘고 덜 외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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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누군가 함께라면 더 기쁘고 덜 외롭지 않을까

입력 2018.07.23 14:34

  •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

우리들은 심신이 약하고 예민할수록 섬세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몸도 마음도 불안정한 나를 붙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웠나 보다.

의사와 환자가 상담하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의사와 환자가 상담하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뉴월 감기를 앓으면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로 한동안 시달렸다.

무리한 일정은 탈이 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더니 내가 방심하는 사이 큰 펀치를 날리고 말았다. 약 먹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예전 같으면 감기를 그냥 몸으로 버티며 해열제와 생강차, 숙면 정도로 지나갔으나 요즘은 일찌감치 동네 병원을 찾아 자진신고한다. 그러나 이번엔 잘 낫지 않고 오래간다. 나이 탓인가? 일찍 자진신고까지 했는데… 속상하고 불안하다.

의사인 친구의 세심한 배려에 호전

개인병원 원장인 친구가 이럴 땐 기력을 회복해야 된다며 수액주사를 맞으러 오란다. 평소엔 이런 종류의 주사는 입원한 중환자나 체력에 민감한 사모님의 전유물로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날 따라 그 중간 어디쯤에 머물고 싶었는지 지체하지 않고 병원으로 갔다. “그렇지. 힘들 땐 이런 주사도 맞고 그러며 사는 거야.” 나 자신에게 세뇌시키듯 말했다. 또한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고 나의 순순한 행동이 대견했다.

“아니 이번엔 또 누굴 구하려고 이런 무지막지한 기침 고문에 참고 버티셨나? 얼마나 소리지르고 버텼으면 이렇게 목에 가래가 끼고 콱 쉬었어.” 친구는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나의 몸상태를 유머러스하게 얼버무린다. 오래전 간단한 맹장염을 참고 버티다 아주 큰 수술로 번진 나의 미련함을 알고 있는 친구가 그때부터 나에게 ‘유관순 열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밤샌 기침고문으로 아픈 뱃가죽을 움켜쥐고 모조리 다 불어도 목소리가 안 나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잖아.” 나는 오랜만에 쉰 소리로 꺽꺽거리며 웃었다.

친구는 그렇게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고 스멀스멀 나이 탓을 하며 올라왔던 내 불안초조는 쑥 내려갔다. 그리곤 친구 의사는 내 상태를 주의 깊게 듣고 아주 세심히 진찰하며 약 처방에 심사숙고한다.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여러 종류의 약을 가감하며 여러 날을 함께 지켜봐 주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아픈 몸으로 한두 시간씩 기다리다 2~3분 의사를 보며 극히 사무적인 얘기만 하는 것에 익숙한 병원과는 달리 친구의 유머는 나를 편안하게 했고, 나만이 알 수 있는 내 몸의 미세한 변화들을 쉼 없이 탁한 쇳소리로 쏟아냈다. 덕분에 한동안 갈피를 못잡고 헤매던 몸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며 호전되었다. 그녀의 세심한 관심이 고마웠고 환자한테 마음 씀이 참 편안했다.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게 이것이잖아. 회복돼서 정말 다행이다.” 나의 감사인사에 그녀가 했던 대답은 의외로 담백했다.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이라는 말이 마음에 훅 들어왔다. 겸손한 자긍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내가 잘하는 것’이라는 말은 어딘지 위엄이 있고 자기중심적이어서 감히 다른 사람이 토를 달 수 없는 것으로, 모두 그것에 따라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잘하는 것’이니 성공이 보장되고 유효할 것이니 누군들 토를 달까.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자기중심적이 될 수 있는 말에 ‘그나마’라는 말이 얼마나 균형을 맞추는지 그 조용한 당당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나 중심이 아닌 환자 중심으로 사용했기에 그토록 질기게 버티던 감기가 호전된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상대방 중심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힘들다. 상대방 아래에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이해하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가 ‘under-stand’ 아닌가. 그러나 전문가가 상대방 아래에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몇 마디 얘기하면 다 알았다는 듯이 그 뒷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래가 아니라 위에 군림하면 상대의 진짜 이야기를 듣기 어렵다.

가슴속에 할 말이 많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금방 견적이 나올 때가 있다. 당연히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들은 대강 몇 마디만 들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더 들을 것도 없다면서 시원하게 해결책을 내놓는다. 물론 상대의 시원한 해결책을 덥석 받아들이며 바로 내 맘이 그 말이라며 기뻐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아직 내 마음을 다 모른다며 자기 입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려 한다. 안타깝게도 성질 급한 상대는 더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데 왜 내 마음을 모르고 안 받아들이냐고 야속해 하거나 배가 부르다고 한다.

비슷한 내용의 얘기 같아도 조금씩 다르고 그 사람 특유의 뉘앙스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의 얘기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좀 더 상대방의 위치로 내려와야 비로소 보인다. 일주일쯤 통증으로 고생하다 의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아픈지, 저번에 아팠던 것과는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려고 하는데, 대충만 듣더니 약 처방해주던 경험이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자녀들 말에 정서적 경청과 지지 필요

가정에서도 인생의 선배인 부모들은 자녀들의 고민이 대충 어떤 종류인지 경험상 안다고 속단한다. 그래서 그런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면 된다고 속 시원한 발 빠른 해답을 주지만 자녀들에게 통하지 않을 때가 많고 오히려 말문을 닫게 할 때가 있다. 지금은 자녀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뻔한 결론인데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부모는 속상해 한다. 비슷하지만 같을 수 없기 때문에 통하지 않나 보다. 결론은 같을지라도 그때 그 과정에선 섬세한 정서적 경청과 지지가 그들에게 더 필요한가 보다.

우리들은 심신이 약하고 예민할수록 섬세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건강할 때는 대충 먹어도, 대충 말해도 적당히 알아서 몸과 마음이 반응하지만 약해지고 민감할 때는 우리의 가장 취약한 어린 시절 채워지지 않았던 모습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밖에서 놀다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울며불며 집에 들어오면 대부분 부모들은 그 설움을 듣기보다는 “뚝! 뚝 그쳐야 착하지” 하며 울음을 잠재우려 했다. 그렇고 그런 얘기들, 조금 지나면 다 별거 아니라는 이치를 부모는 여러 아이들을 키우며 일찍이 터득한 바다. 그저 코 풀리고 세수시키고 맛있는 것 주면 아이는 울음을 삼키며 분함도 서러움도 함께 삼킨다. 그리곤 가끔씩 흐느끼다 먹는 재미에 슬픔을 잊고 만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몸도 마음도 불안정한 나를 붙들어줄 누군가가 그리웠나 보다. 매일 의사의 지시를 따르고 약도 꼬박꼬박 먹어도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나이 탓을 해야만 할 때 오는 무력감이 참 난감했다. 착하게 굴었는데도 엄마 아빠의 다툼이 왠지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또는 보물찾기에서 열심히 찾았지만 나만 못찾았던 무안함과 속상함을 애써 감추고 돌아섰던 것처럼, 누군가 내 서럽고 불안정한 마음을 만져주길 바랐던 아이처럼 말이다.

아무리 기쁜 일도 아무리 슬픈 일도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러나 그 지나감이 사실일지언정 그 당시 그 곁에 누군가 함께해준다면 더 기쁘게 덜 외롭게 이겨내지 않을까. “친구야 힘들 때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함께 웃어줘서 힘이 나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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