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녀의 문제, 고부 갈등, 장인·장모가 주는 스트레스, 상사와 부하직원의 힘겨루기 등 그 복잡하고 공평치 않은 수직적 관계를 어떻게 서양 철학자가 쓴 책이나 유명강사의 깔끔한 특강으로 풀겠는가?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표현한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카톡! 카톡!”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나누는 카톡방에 재밌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젊고 예쁜 아내가 의자에 앉고 남편은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쭈그리고 앉아 아내 발을 다정하게 씻기며 사랑스런 대화를 나눈다. 그때 갑자기 시어머니가 들어오자 아들 내외는 당황한 나머지 아들은 자기 머리를 발 씻던 물 속에 처박고, 아내는 남편 머리 위로 그 발 씻던 물을 끼얹으며 원래 아내가 남편 머리를 감기고 있었던 것처럼 시어머니 앞에서 연출하는 익살스런 장면이다. 한참을 웃었다.
“참 기가 막히다, 기가 막혀. 아들 애써 키워서 저러고 있으면 속에서 열불 날 것 같아.” 한 친구가 후다닥 댓글을 단다.
“그래도 재치 있지 않니? ㅎㅎ” 귀엽다는 듯 딸만 둘인 친구가 상큼한 이모티콘과 함께 재빠르게 멘트를 날린다.
“그저 못본 척하는 게 대수야”
“그저 못본 척하는 게 대수야. 에미들도 이젠 우아하게 살아야지. 눈 흘겨봤자 늙어서 돌아오는 게 구박밖에 더 있겠어. 지금부터 보험 들어 놔야지.” 갓 시어머니가 된 그녀의 한마디가 어딘지 위엄있게 들렸다. 웃자고 찍은 한편의 짧은 동영상에 대해 모두의 생각은 제각각이구나 하고 생각할 즈음에 또 다른 댓글이 올라왔다.
“얼마 전까진 그랬을지 몰라도 이젠 요즘 애들 저러지 않아. 그냥 하던 대로 발 씻기면서 ‘어머니 웬일이세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할 걸. 그러면 엄마들은 한술 더 떠서 ‘그래 서로 아끼고 잘해주며 살아야지’ 하며 돌아서선 부글부글하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어딘지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에 시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힘들어도 어른들 앞에서 다리를 펴지도 못하고 겨우 자기 방에 돌아와서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눕곤 했다. 사이 좋은 부부들은 남편들이 아내의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다 시어머님이 방에 다가와 헛기침이라도 하며 들어오시면 며느리는 누웠던 티를 안 내느라고 머리를 쓸어올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아들은 ‘어머니 아들은 아내 다리나 주무르는 변변치 못한 놈이 결코 아닙니다’라는 듯이 의연한 척 신문을 슬쩍 집어들었다. 어머니는 역시 그런 아들을 곁눈질하며 며느리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봤지? 내 아들! 네까짓 게 젊어 봤자 야!’ 했다.
이제는 예전에 비해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훨씬 줄어들었다. 예전에 아들 며느리였던 그 세대들이 이제는 시부모 세대가 됐으나 역할이 반복되지는 않는 것 같다. 세상은 점점 더 솔직히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걸 세련된 것이라고 여기저기서 속삭인다. 또한 개개인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며 살기를 매체마다 부추기고 있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솔직함이 관계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을 종종 본다.
“참견하지 않는 게 상책이에요.” 아들 며느리가 도와달라는 것만 도와준다는 어느 부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아이들의 생활에 대해 일절 의견을 안 갖는 게 서로에게 좋은 것 같다는 그녀는 종종 남편과 아들네 일로 다툰단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들집은 본인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남편은 오가는 길에 아들집을 올려다보면서 집에 불이 켜졌느니 꺼졌느니, 창문이 열렸느니 닫혔느니 일일이 관심을 갖고 기웃거린단다. ‘제발 관심 끄세요.’ 그 한마디에 남편은 화를 낸다. ‘내 아이들한테 내가 관심 갖는 게 뭐가 잘못됐어.’ 때때로 손녀가 좋아하는 딸기를 사들고 앞장서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란 철없는 아이 달래는 것만큼 힘들단다. 그녀는 손녀를 봐달라고 부탁할 때만 들르지 그냥 가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결혼한 딸이 친구들로부터 따끈따끈한 한 뭉치의 충고를 떠안고 와서는 재밌다며 들려준다. 주제는 ‘시댁’이었다. 듣고 있으려니 뒤통수가 뜨끔거리기도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젊은 며느리들이 너무 과민반응인 것 아닌가 생각이 들 때는 ‘그렇게 똑똑하게 굴어봐야 별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기도 했다. 딸 친구들이라면 몇 년 전만 해도 자신들밖엔 생각지 않던 철없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며느리들’이 되었구나.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깐, 그 아이들이 어린 자기 애들과 남편, 혹은 시부모에게 행동하는 것을 들으니 그 현명함에 깜짝 놀랐다.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시댁에 관한 흉이나 충고는 그저 그 자체일 뿐, 막상 일상에서는 유연하고 현명하게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책이나 강의도 많이 듣는 세대라 그런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잃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노하우를 어떻게 익혔을까?
“너희들한테 얘기하니까 속이 확 풀린다”
내 친구들은 또 어떤가. 물론 만나면 섭섭했던 일, 속상했던 일 얘기하느라 몇 시간이 금방 간다. 자녀들과의 감정 문제로 속상해하는 어떤 친구가 있으면 팔 걷어붙이고 이구동성으로 “절대 봐주지 마! 한 번 봐주면 끝도 없어!”라며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결국 내 친구의 삶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균형을 잘 맞추며, 쾌적한 집안 공기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남편과 저녁에 차 한 잔 마시며 야식 삼아 낮 동안에 있었던 애들 이야기를 곱씹을 때가 있다. 괘씸했던 문자, 섭섭한 한마디, 다 컸다고 으등거리는 불협화음을 말할 때면 남편은 안타까움에 되레 면박을 주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껄껄 웃기도 하는 등 나름 애쓰며 이해해준다. 역할이 반대가 되면 나 역시 남편 편에 서 있기 위해 삼류 연극배우가 된다. 그렇게 우리만의 야식을 ‘씹고’ 나면 아직 마음속 앙금이 다 풀리지는 않아도 일단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한숨 자고 나면 다시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어젯밤 내 말을 들어줬던 남편이 가장 고마워진다.
부모·자녀의 문제, 고부 갈등, 장인·장모가 주는 스트레스, 상사와 부하직원의 힘겨루기 등 그 복잡하고 공평치 않은 수직적 관계를 어떻게 서양 철학자가 쓴 책이나 유명강사의 깔끔한 특강으로 풀겠는가? 어쩌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남편 혹은 아내를 붙들고 면박받으며 했던 신세타령 속 그들의 공감이 복잡미묘한 관계를 푸는 명약이었는지 모른다.
“어우, 너희들한테 얘기하니까 속이 다 확 풀린다.” 친한 친구들 모임에서 섭섭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평소와 다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아들 내외 흉을 보던 친구의 말이다.
“얘, 너니까 그만큼 했지 다른 집 같았으면 네 아들 며느리 혼쭐났을 거야. 걔들 엄마 잘 만난 줄 알아야 돼! 어디서 행복한 줄 모르고….” 다른 친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편을 든다.
아들 내외 때문에 힘들었던 친구는 그제야 원래의 너그럽고 밝은 얼굴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른다. 실제로 그 아들 내외의 사정이 어떤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건 내 친구가 편한 마음으로 일상에 돌아가면 현명하게 들어주고 해결할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내 친구가 자기답게 넉넉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원래 컨디션을 회복해주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환풍구를 열어줌으로써 불필요한 과열은 빼고, 다시 쿨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