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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5만원권은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18.03.26 17:04

  •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이명박 정권이 전격적으로 밀어붙인 5만원권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다. 지하경제를 축소시키고, 보다 발전된 현금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해 우선 5만원권 발행을 중단하고 더 나아가 폐지해야 한다.

KEB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KEB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펼쳐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캐시프리(cash free)라는 말이 있다. 현금 없는 경제를 말한다. 이번 블록체인 소동도 어찌 보면 캐시프리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이른바 ‘화폐 소멸시대’라고도 한다. 화폐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명저 <자본론>의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고, 1권의 내용은 자본, 상품, 화폐로 이루어져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관한 책이다. 한국어판 <자본론>(김수행역·비본출판사)을 보면 전 3권 2806쪽 중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이야기한 것은 13쪽(0.5%)밖에 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며 화폐를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봤다. 책에는 자본주의 위기를 타개하는 역할을 한 케인즈가 쓴 글도 인용되어 있다.

카드 단말기로 구걸하는 시대 오나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결제를 비현금결제라고 한다. 최근 한국의 소비자 지출행태의 70%가 이런 비현금결제다. 2014년까지만 해도 현금 사용이 신용카드보다 높았으나 2015년부터는 신용카드 사용이 현금 사용을 앞섰다. 체크·직불카드까지 합하면 차이는 더 커진다.

이런 추세라면 걸인도 카드 단말기를 가지고 구걸하는 ‘현금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다른 나라 사례는 더하다. 스웨덴은 1661년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했지만 현재 현금 결제 비율은 2% 수준이다. 자판기에도 현금투입구가 없다고 한다. 프랑스나 스페인 등 대부분 유럽국가는 1000유로 이상은 현금 결제를 ‘금지’하고 있다. 유럽위원회(EC)는 2017년 1월, 2018년 전유럽에 걸쳐 현금거래를 제한하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여기서 걸리는 나라가 있다. 독일이다. 독일은 현금을 많이 쓰는 유일한 나라다. 결제수단 중 현금 거래 비중이 80%에 달한다. 유별난 현금 사랑이다. 전체 유럽연합이 발행한 유로화의 절반이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발행할 정도이다. 이에 다른 국가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시대에는 현금이 사라져야 중앙은행이 새로운 경제위기에 대응할 정책적 유연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폐 소멸은 전세계적인 흐름이다. 물론 화폐가 사라진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생활은 이미 화폐 소멸 사회에 다가가고 있다. 동전이 대표적이다. 한국은행은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제조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보안과 사생활 침해 등은 넘어야 할 과제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를 역행하는 상황이 있다. 바로 5만원권의 ‘화폐 발행 잔액’이다. 화폐 발행 잔액은 공급된 화폐에서 환수된 금액을 제외한 것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7년 6월 기준으로 회수되지 않은 5만원권은 80조원에 달하며 상반기에만 4조5000여억원이 늘어났다고 한다. 5만원권이 2006년 6월 처음 도입된 것을 고려하면, 지난 8년 동안 연평균 10조원씩 회수되지 않고 시중에 남은 셈이다. 전체 화폐 발행잔액인 101조원의 대략 80%가 5만원권이다.

5만원권 발행량도 증가했다. 총화폐는 50억장에 이르는데 그 중 1만원권이 15억6000장이다. 최근 5만원권은 이를 넘어섰다. 다른 화폐는 발행이 감소하는 데 비해 5만원권만 발행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즉 ‘화폐세계’에서는 5만원권이 대세다. 이 많은 5만원권들은 어디 있을까. 돌아오지 않는 돈들은 지하경제에 머무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은행도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런 돈을 ‘장롱예금’이나 ‘김치냉장고 신사임당’이라고도 한다. 검찰이 압수수색에서 5만원권을 발견하는 장소들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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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5만원권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지난해 회수율은 65%에 이른다. 2016년 회수율은 49%였다. 신사임당의 귀환이라 불릴 정도이다. 이는 구권 유입이 증가하고 은행들이 2015년부터 명절 등 화폐가 대규모로 방출되는 기간에 1만원 신권을 늘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1만원권 환수율은 100%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조심스럽게 낙관론을 펼치고 있는데, 5만원권의 내구성 등을 감안하면 100개월 안팎이기 때문에 8년이 지나면 환수율이 높아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역시 추정에 가깝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화폐 없는 사회를 맞이했다. 공식화폐인 법화(法貨)를 갖고 있으면 부패와 탈세 혐의로 의심 받는 단계로까지 접어들었다. <화폐의 종말>을 쓴 미국 하버드대 케네스 로고프 교수는 이런 현상을 ‘현금의 저주’라고 했다. 따라서 화폐개혁이 필요하다. 우선 새롭게 도안된 신권을 도입하는 방안이다. 실제 여러 나라가 이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2013년, 이듬해에는 일본이 20년 만에 신권을 발행했다. 그 뒤를 중국이 따르고 있다. 아직도 전두환 정권의 구권화폐를 가지고 있다는 사기꾼들이 잡히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화폐 거래 단위를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는 나라들도 있다. 터키, 모잠비크, 북한 등이다. 우리나라도 전 한국은행 총재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1000원을 1원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지하경제를 축소할 뿐 아니라 소비 촉진을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1만원이 10원이 되면 심리적 부담이 적어서 더 쉽게 소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가 달러를 들고 외국을 여행할 때 더 많이 소비하게 되는 경향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이제 ‘현금의 저주’를 멈춰야 한다

고액권 발행을 중단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논쟁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00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싱가포르가 따르고 있고, 유럽중앙은행도 500유로 발행을 한시적으로 중단한 상태이다. 미국에서도 100달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화폐 소멸시대에 걸맞지 않은 5만원권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논의되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권이 전격적으로 밀어붙인 5만원권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다. 지하경제를 축소시키고, 보다 발전된 현금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해 우선 5만원권 발행을 중단하고 더 나아가 폐지해야 한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적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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