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오후 서울 도심은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로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흔히 ‘태극기 집회’라 부르지만 태극기 숫자만큼이나 수많은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간간이 이스라엘 국기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 일부 현수막에는 일장기가 등장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한·미·일 동맹 강화와 박근혜 탄핵 무효를 외쳤다. 일제에 항거했던 역사를 기념해야 할 자리건만 자주는 사라지고 외세 의존의 목소리만 한껏 드높았다. 독립운동 중에 희생된 선조들을 추모해야 할 자리건만 국정을 파탄내고 감옥에 간 친일파의 후예를 옹호하는 기괴한 광경만 펼쳐졌다.
이 날의 태극기는 1919년 3월의 태극기와 의미가 달랐다.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에서 젊은이들의 다양한 패션 소품으로 등장했던 태극기와도 의미가 달랐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까지 평창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의 왼쪽가슴에 찬란히 새겨져 있던 그 태극기와도 전혀 의미가 달랐다. 태극기라는 상징이 촛불의 대척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친미와 보수로 변질되고 말았다.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할 상징이 특정 정파의 전유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는 태극기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와 비슷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자유는 근대 이후 인류의 최고 가치이자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다. 숱한 명멸을 거듭해 온 한국 정당사에는 ‘자유’란 단어가 많이 등장해 왔다.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3당 통합으로 결성된 민주자유당,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 그리고 지금의 자유한국당 등이 정당 명칭에 ‘자유’란 단어를 앞세웠다. 역설적이게도 하나같이 우리 정치사에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독재정권의 주역이거나 그 후계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정당들이다. 그래서 한국 정치에서 ‘자유’란 단어는 본래의 의미와 거리가 먼 반민주적 정치세력들의 독점물처럼 변질되고 말았다. 반면 ‘자유’란 단어를 빼앗긴 개혁적 정치세력은 그 대신 ‘민주’라는 단어를 정당 명칭으로 애용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해 왔다.
태극기나 자유라는 단어가 이렇게 왜곡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 투쟁의 결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는 사회를 이질적 속성들 간에 차이를 근거 삼아 지속적인 구별짓기가 일어나는 공간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안에서 상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인정 투쟁을 펼친다고 설명한다. 광장정치에서는 태극기와 촛불 사이에, 정당정치에서는 ‘자유’와 ‘민주’ 사이에 구별짓기가 고착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민심 이반에 직면한 적폐세력들은 얼핏 정치적으로 패배한 듯 보이나 이렇듯 상징 투쟁에서는 태극기와 자유라는 성과 높은 전리품들을 차곡차곡 챙기고 있다. 상징 탈환을 통한 보편적 가치 회복이 적폐 청산의 또 다른 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