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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선사하는 사유의 순간

입력 2018.02.26 18:35

  •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

우리 연극계에서 배삼식이라는 작가의 존재는 특별하다. 창극, 뮤지컬, 창작극, 번역극 등 손대는 장르마다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믿음직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남다른 시야와 생각의 깊이로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배삼식 작가, 손진책 연출의 <3월의 눈> 또한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요히 흘러가는 삶의 시간을 응시하게 만드는, 사유와 여백의 연극이다. 온 세상을 뒤덮을 듯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의 눈이 아니라, 온 듯 만 듯 살짝 내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3월의 눈’처럼 고요히 자신의 시간을 다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차분한 성찰을 담고 있다.

‘3월의 눈’ |국립극단

‘3월의 눈’ |국립극단

서울 한 구석, 재개발 열풍 속에 저물어가는 한옥 한 채가 작품의 배경이다. 노부부 장오와 이순은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이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노부부는 아무 일 없는 듯 겨우내 묵었던 창호지를 문에 새로 바르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어느덧 이삿날이 다가오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한옥을 뒤로 하고 그들은 집을 떠난다. 눈 내리는 3월의 어느 날,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은 어찌 보면 쓸쓸하지만, 그보다는 담담한 여운을 남기면서 고요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2011년 초연 당시 <3월의 눈>은 우리 연극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원로배우 백성희·장민호에게 헌정된 작품이었다. 두 배우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 극장의 개관공연이기도 했던 이 작품에서 백성희·장민호는 80대의 몸을 이끌고 가만히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고 연극이 되는 연륜의 힘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2012년에 장민호 배우가, 2016년에 백성희 배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공연은 또 다른 배우들의 연륜과 생명력으로 계속해서 그 여운을 이어가고 있다. 명동예술극장 무대로 자리를 옮긴 이번 공연에서는 2011년 초연을 함께했던 장오 역의 오영수와 2015년 공연을 함께 했던 이순 역의 손숙, 그리고 노배우의 연륜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오현경과 정영숙이 참여해 또 다른 색깔의 여백을 그려낸다.

<3월의 눈>의 또 하나의 주인공은 ‘침묵’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배삼식 작가의 작품에는 여백 혹은 침묵과 같은 ‘말 없는’ 순간들이 꼭 등장하곤 한다. 언젠가 작가는 자신이 쓰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결국 그 침묵의 순간을 위해 쌓아올려지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더 이상 어떤 언어나 표현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순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풀어가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작품 속에서 그것은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고, 관용의 순간이기도 하다. <3월의 눈>에서도 작가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정리하고 떠나는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들, 변해가는 일상에 대한 사유를 느림과 침묵의 순간 속에 차분하게 펼쳐낸다. 3월 1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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