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신과 함께>를 보자고 했다. 내가 짐짓, ‘무슨 그런 황당한 영화를? 보려면 <1987>을 봐야지. 내가 저 나이 땐 공의(公義)로 피가 끓었건만!’ 노골적인 핀잔은 가렸다지만, 영 마땅찮아 하는 기색을 눈치 챈 아들은 “1987이 뭐지?”하면서도 자기주장을 거뒀다. 그야말로 ‘경건한 마음’으로 <1987>을 봤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1987>은 분명 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집단경험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낸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 하나하나의 기억과 에피소드들이기도 할 것이다. 공적 기억이란 기실 사적 경험의 총화가 아닌가. 어쩌면 사람들은 ‘나’의 경험을 통해 투사된 기억으로 역사적 사건을 제 나름대로 불러내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나의 <1987>에는 무덤까지 가져가고픈 부끄러운 기억이 얽혀 있다. 최루탄과 화염병과 투석이 일상이었고, 투신과 분신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모두들 눈에 핏발이 곤두 서 있었다. 나는 운동권 선배랍시고 공공연하게 4인용 기숙사 방을 혼자 쓰는 호사를 누렸다. 어? 담배가 없네, 선배의 혼잣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후배들은 총알처럼 뛰어나가 담배를 사오던 시절이었다. 싸우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특권의식과 권위주의로 치자면 이쪽도 결코 저들에 뒤지지 않았다.
어느 날 늦은 밤 후배 여학생 A가 내 방을 찾아왔다. 평소 딱 부러지던 후배 A는 그날 따라 하나마나한 얘길 한참동안 늘어놓았다. 늦은 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참다못해 “그래, 네가 주장하는 바가 뭐냐”고 말을 잘랐다. A는 얼굴이 벌게진 채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선배를 좋아하게 됐다고, 언제고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노라고 했다.
순간 매우 당황했다. 이제껏 내세워 온 권위가 졸지에 무너지는 듯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크게 당황했던 데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A에게 ‘은밀한 감정’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나는 ‘운동권’에, ‘엄격한 선배’였다. 게다가 평소 입만 열면 ‘시국의 엄중함’과 ‘사적인 것의 부도덕성을 규탄’해오지 않았던가. 그깟 연애감정이라니! 깊이 감춰 둘 일이었다. A에게는 물론 후배들에게 행여나 그 추잡한(!) 속내가 드러날까 수시로 긴장했다. 감추고자 하는 만큼 오히려 더 냉정히 A를 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A의 고백은 그런 나의 속내를 정통으로 꿰뚫는 듯했다. 1초가 몇 시간 같던 그 순간에도 온통 어떻게 하면 위신을 지킬 수 있을까뿐이었다. 이미 등짝에선 식은땀이 흘렀지만, 나는 애써 위엄을 갖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애정을 사회화시켜라. 시국이 어느 시국인데 그런 사치를 부리냐, 나가라.” A가 그때 보인 눈물과 나를 바라보던 그 눈초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선배, 그런 멋진 말, 나도 할 줄 알아요. 사람을 잘못 봤네요. 실망입니다.” 방문을 나가며 내게 뱉었던 A의 말이 소위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라는 대의로 그럴 듯하게 포장된 나의 ‘거짓’과 ‘허풍’과 ‘위선’과 ‘싸구려’를 한껏 경멸하고 조롱한 것임을 나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깨우쳤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삶은 대개 비극으로 다가오지만, 지나고 나면 희극이라지만, 내 삶에서 <1987>은 오로지 부끄러움만으로 남겨졌다. 오늘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이 창밖에서 쇳소리를 내며 지날 때면 <1987>즈음, 그 겨울밤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스르륵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마치 겨울나그네처럼.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