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많은 과학자들이 남한을 떠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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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많은 과학자들이 남한을 떠난 까닭은

입력 2017.10.16 19:25

미 군정은 1946년 7월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일명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국대안은 발표 즉시 각계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대안 파동이 남긴 상처는 작지 않았다.

사진은 1946년 7월에 열린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을 찍은 것이다. 일제 패망 직후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이 떠나가자, 한국인 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접수하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한국인 학생들도 대부분 귀국해 합류하였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미소를 지으며 함께 하고 있는 교수와 학생들은 현실에서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새로운 대학의 미래상을 둘러싸고 대학 구성원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한껏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졸업식 사진. 앤스테드 총장을 비롯한 미군 쪽 인사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제대의 교수가 되어 큰 관심과 기대를 받았던 두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는 각각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서울대기록관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졸업식 사진. 앤스테드 총장을 비롯한 미군 쪽 인사들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에 교토제대의 교수가 되어 큰 관심과 기대를 받았던 두 과학자, 이태규와 리승기는 각각 맨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왼쪽에서 다섯 번째에 앉아 있다./서울대기록관

대학 발전에 대한 서로 다른 상상들

경성대학의 운영을 주도한 한국인 교수들 가운데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공계에서는 이공학부장 대리였던 이론물리학자 도상록(1903∼1990)이 좌익계 과학기술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성향의 교수와 학생들은 현실정치의 좌익계 정당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반공세력을 지원하던 미 군정과는 불편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또 이들 나름대로 미 군정이 자신들이 지닌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고 친미 반공 성향이 강한 미국 유학파 교수들만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미 군정과 좌익계 교수들 사이의 갈등은 해방된 한국의 고등교육정책을 어떻게 짤 것인지에 대한 의견 대립이기도 했다. 한국인 교수들은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이 각각 하나의 엘리트 대학으로 승격하여 각자의 학풍과 전통을 이어 나가기를 기대했다. 일본에서도 종전 후 미 군정이 전문학교들을 대부분 대학으로 승격시켰으므로 이들이 무리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 군정의 눈에는 일본인 교수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한반도의 고등교육기관들은 승격은 고사하고 존속 여부도 불투명해 보였다. 또한 산업화를 달성한 일본 본토와는 달리 한반도는 아직도 농업사회를 벗어나지 못했고 중등교육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는데, 이런 처지에 교수들의 바람처럼 많은 수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미 군정의 지극히 냉정한 판단이었다.

미 군정은 1946년 7월 ‘국립종합대학 설치계획안’(일명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경성대학과 각종 관립 전문학교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라는 거대 대학을 세운다는 내용이었다. 미 군정은 이에 앞서 6월에 공금을 횡령했다는 핑계로 도상록을 파면하여 학내 반대세력의 힘을 꺾으려 했다.

국대안은 발표 즉시 각계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새 나라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한국 지식인들은 국대안을 “너희들에게는 그렇게 많은 대학이 필요 없다”는 미 군정의 냉랭한 통보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였다. 학교의 이사와 총장이 모두 미국인으로 정해진 것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다. 강제로 통합을 당하게 된 학생들도 반발했다. 경성대학 쪽은 전문학교와 합치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겼고, 전문학교 쪽도 나름의 전통을 버리고 차별대우를 감수하면서까지 경성대학과 통합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국대안 발표 직후 모두 반대 성명을 냈다. 각각의 성명서 발표를 보도한 신문기사. /서울대기록관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 국대안 발표 직후 모두 반대 성명을 냈다. 각각의 성명서 발표를 보도한 신문기사. /서울대기록관

사진 속 과학기술자들의 절반만 남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군정은 “국대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좌익”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국대안을 밀어붙였다. 국대안 자체에는 비판적이었던 이들 중에도 이 논리에 설득되어 “좌익의 무책임한 선동을 내버려둘 수 없으니, 일단 개교는 하고 보자”는 논리로 사실상 찬성으로 돌아서는 이들이 늘어났다.

결국 국대안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에 충돌이 이어졌다. 오늘날 서울대학교는 10월 15일을 개교기념일로 쇠고 있지만, 실제 1946년 10월 15일은 성대한 개교 행사 같은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교직원의 집단 사직, 학생들의 동맹휴학, 학교의 무더기 제적과 파면처분, 대학병원의 진료 거부 등이 1947년 2월까지 이어졌다. 미 군정이 대학 이사와 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고 1947년 6월에는 제적되었던 학생들의 무조건 복교를 허용하면서 비로소 ‘국대안 파동’은 수습되었고, 7월에 서울대학교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이 남긴 상처는 작지 않았다. 도상록과 리승기(1905∼1996)를 비롯해서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진의 약 40%에 이르는 22명,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많은 학생들이 국대안 파동과 한국전쟁 휴전 사이의 혼란한 시기에 자의건 타의건 북으로 갔다. 위 사진 속 과학기술자들 중 절반가량이 남한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북으로 가지 않은 이들 중에도 한국을 떠난 이들이 있다.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으로서 서울대학교 설립과정에 깊이 참여하고 개교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지낸 이태규(1902∼1992)는 국대안 파동의 와중에 반대파의 으뜸가는 표적이 되었다. 비방과 협박이 쏟아졌고, 일본 시절부터 함께 했던 아끼는 제자들도 사표를 던지며 등을 돌렸다. 이태규는 결국 한국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1948년 미국 유타대학으로 떠나고 말았다.

국대안 파동은 서울대학교의 출발점인 동시에 한국 과학계 분단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 시작이 갈등과 고난으로 가득했음을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과학계가 이만큼 높은 수준의 연구역량을 갖추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성취를 찬탄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픈 과거는 미화하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 모든 역사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는 없고, 아프고 험한 역사는 그에 맞게 기억하는 방식이 있는 법이다. 10월에 굳이 국대안 파동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까닭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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