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1964~ )
이 작은 포도알 속에도
몇 개의 딱딱한 씨가 들어 있다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
입안에서 터지는 이 부드러운 포도알 속에도
그냥은 삼킬 수 없는 응어리라는 듯 씨가 맺혀 있다
이 달콤한 포도알을 굴리거나 누르며 지그시 씹을 때도
절로 생겨나 거저 여물 리 있겠느냐는 듯
난자이며 정자인 씨가 혀에 걸린다
손길만 닿으면 건들건들 떨어져내리는 포도알 하나에도
돌부리처럼 걸려 넘어지는 옥니박이 씨가 숨어 있구나!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비 온 날이 많아 포도농사를 망친 친구가 있다. 포도알이 한창 익을 무렵, 비가 왜 그리 많이 오던지. 그 친구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예약 주문을 모두 취소했다. 그러고 나서 묵묵히 그나마 성한 포도를 골라 즙을 내렸다. 그 집 포도맛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내년 포도를 미리 주문했다.
<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