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처럼 서양과의 만남이 좋은 결과를 불러온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일찍 유럽과 만났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로 전락하여 가혹한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네덜란드 덴하그(헤이그)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각종 문서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어서 해양 강국으로 큰 부를 쌓아올렸던 네덜란드의 호시절을 엿볼 수 있다. 17∼18세기의 항해용 해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인도양을 그리고 있다. 북서유럽에서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양에 이르는 항로에 대한 정보가 네덜란드 무역활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해도들이 다루는 지역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해당하는 수천 개의 섬들을 지나 남중국해를 거쳐 중국의 남부해안 도시들과 일본의 규슈 지역까지 뻗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좀 더 북쪽, 즉 한반도와 중국 북부, 일본 혼슈 지역 등은 좀처럼 네덜란드 사람들의 해도에 등장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심사였던 향신료가 나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고, 세 나라 모두 강력한 중앙정부가 외국과의 교역을 그다지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뒷날 영국이 아편전쟁(1839∼1842)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청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중국과 같은 강대한 나라를 무력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럽의 강대국들은 17∼18세기에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유린하며 큰 부를 쌓아올리면서도 동북아시아에 대해서는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도자기와 차 등 중국과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품을 거래하기 위해 유럽의 배들이 오가기는 했으나, 중국과 일본의 중앙정부는 정해진 장소에서만 교역을 허가하는 등 교역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국 명말청초에 걸쳐 국립천문대인 흠천감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폰 벨(1592~1666)의 초상화. 청의 관복을 입고 서양식 천문 관측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이 당대의 동서 교류의 폭과 깊이를 보여준다. /필자 제공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와 청제국보다도 더 소극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해금(海禁) 정책을 펼쳐 대양 항해를 철저히 금지하였으므로, 배들은 조선의 강역을 벗어나지 않고 연안과 강을 오르내렸을 뿐이다. 따라서 하멜처럼 ‘운 나쁘게’ 조선 땅에 표착한 이들의 기록을 빼고는 조선에 대한 정보가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유럽이 조선에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이 사대교린의 세계 바깥에 관심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못된 만남’ 피했다면 좋은 일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사학계나 독서대중은 일찍부터 서양인과 조선인의 만남, 또는 서양 문물의 조선 전래에 대해 대단히 관심이 많았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배경에는 조선이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깔려 있다. “왜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니 “서양의 과학기술을 일찍 받아들이지 못해서”라는 답이 나오고, 그 까닭을 다시 물으니 “서양인과 너무 늦게, 너무 적게 만나서”라는 답이 따라 나오는 것이다. 때로는 “서양 선교사가 진작 조선에도 왔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1970∼80년대 한국사학계에서 각광받던 주제 중 하나는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조선 유학자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 교분을 맺었으며, 그 만남이 뒷날 ‘실학’으로 불리게 된 새로운 지적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서양인과 일찍 또 자주 만나서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면 근대화로 이어지는가? 사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은 아니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다름 아닌 일본을 의식해서다. 막부가 제한적으로나마 나가사키 등을 통해 네덜란드의 문물·과학과 의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후에 서양 과학기술을 효과적으로 익히고 나아가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인도양과 남중국해의 주요 해안 도시를 담은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해도. /네덜란드 국립기록관 소장
그런데 이와 같은 서사는 일본에서도 먼 훗날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든 설명해야겠다는 목표 아래 구성된 것이다. 일본 사학계 안에서도 19세기 말 일본의 급성장은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행운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행운도 실력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서양인과 얼마나 자주 또는 일찍 접촉했는지가 과연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19세기 중반 이전의 세계에서는 유럽인들조차도 유럽이 동아시아를 쉽게 압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니 망국의 한을 거꾸로 대입하여 “왜 그때 더 열심히 배우지 않으셨나요”라고 조상들을 원망한들 부당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일본처럼 서양과의 만남이 좋은 결과를 불러온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일찍 유럽과 만났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로 전락하여 가혹한 수탈을 감내해야 했다. 네덜란드의 군대가 몰려가서 격렬한 전쟁으로 수많은 원주민의 목숨을 빼앗고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 식민지를 건설한 역사를 생각하면, 군대를 실은 멀쩡한 배가 들어오지 않고 하멜이나 벨테브레 등이 도움이 필요한 처지로 떠내려 온 것은 조선에 오히려 행운이 아니었겠는가?
역사는 과거를 탓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루지 못한 근대화에 대한 아쉬움은 한국인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과거의 일을 당시 일어나지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었던 미래에 끼워 맞춰 재단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할 질문은 “얼마나 일찍 서양 선교사를 만났는가” 또는 “얼마나 일찍 자명종을 들여왔는가”와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람들은 무엇을 알고 싶어했는가” 또는 “당시 조선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고자 했는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우리의 시각에서 질문을 새롭게 던질 때, 조선과 유럽의 교류의 역사도 주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