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한 ‘DDT 계란’ 농장이 남긴 교훈… 전국 토양 농약오염 실태 점검 계기로
낯선 사람들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비닐하우스 크기의 커다란 닭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닭 수백 마리가 내달렸다. 퍼드득 날갯짓 소리에 뒤섞여 흙먼지가 일었다. ‘닭 되게 빠르구나. 그리고 냄새가 안 나네?’ 8월 24일 경북 영천시 도동 이몽희씨(55)가 운영하는 농장의 풍경을 보고 딱 떠오른 생각이었다. 닭과 계란에서 맹독성 농약 성분인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가 검출됐다는 그 ‘친환경 농장’이다.
3.3m² 면적당 닭 4마리 사육
‘DDT 계란’의 속사정을 듣기 위해 농장을 찾았다. 농장은 DDT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닭은 총 8000여 마리. A~J동으로 분류된 10개 닭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닭장 바닥은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었고, 닭털도 곳곳에 떨어져 있었다. 닭장 오른쪽에는 땅 위에서 150cm가량 떨어진 검은색 바구니가 줄지어 설치돼 있었는데, 한 바구니에 닭이 5~6마리씩 있었다. 알을 낳는 공간이다. 왼쪽에는 물과 사료 바구니가 매달려 있었다. 닭장마다 너른 마당이 있다. 마당과 계사가 하나의 세트로 한 동이다. 여기다 횃대까지 합쳐 1평(3.3m²)당 닭 4마리의 공간으로 두는 것이 농장주 이씨의 원칙이다. 사방에 닭이 수백 마리 있다는데,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구수한 된장찌개 비슷한 느낌의 냄새가 날 뿐이었다. 참새떼가 트인 천장을 통해 오갔다. 닭장 안에서 솜사탕을 뜯어놓은 것 같은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8월 24일 재래닭을 키우는 경북 영천시 도동 이몽희씨의 농장 닭장의 모습. 흙바닥과 모이주머니, 나무로 만든 횃대 등 닭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DDT 검출로 인해 닭들은 살처분됐다./우철훈 선임기자
J동에는 생후 56일 된 닭들만 모여 있다. 노란 빛깔은 찾아볼 수 없는 적갈색 깃털과 체구는 닭에 가까웠지만 삐약삐약 우는 소리만큼은 영락없는 병아리다. 이 무렵부터 닭은 알을 낳을 수 있다. 계란은 하루 2000여개가 생산된다. 판에 담아 컨테이너형 건물에 따로 쌓아 놨다. 이 농장의 닭들은 체구가 작았는데 계란도 작았다. 사람의 엄지와 검지를 붙여 만든 둥그런 구멍을 쏙 빠져나갈 법한 크기에 표면은 매끈하고 단단했다. 이씨가 계란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했다.
“오늘 다 폐기할 것입니다. 저 닭들도 마찬가지고요. 땅이 오염됐는데 어쩔 수 없지요. 오늘 저녁에 수의사 진단 받는 대로 약 살포하고 자루에 담아 처분합니다. 오늘이 우리 농장 마지막 날입니다.”
DDT 때문이다. 경북 동물위생시험소가 이씨의 농장에서 닭 8마리를 검사한 결과 모두 DDT 성분이 검출됐다. 2마리에서는 기준치 이상인 각각 0.41, 0.305㎎/kg이 확인됐다. 앞서 계란에서도 0.047㎎/kg의 DDT 성분이 검출됐다. 계란의 잔류 허용기준치는 0.1㎎/kg, 닭은 0.3㎎/kg이다. 협동조합 한살림을 통해 납품되던 닭과 계란이었다. 이씨는 “DDT가 나왔다기에 그것이 뭔가 부랴부랴 공부했다. 1979년부터 금지된 물품이지만 반감기(양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기간)가 참 길더라. 내 몸에도 남아서 죽을 때까지 안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바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DDT의 반감기는 2~15년으로 잘 분해되지 않으며 몸속의 지방 성분에 주로 쌓인다. 한 번 몸에 쌓이면 8분의 1로 줄어드는 데 최장 45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재앙이지. 1960~70년대 식량 증산한다고 DDT 많이 썼는데, 당시에는 공론화도 안 됐고. 슬픈 역사의 흔적이 이제야 드러났는데 어쩌겠어요. 받아들여야지.”
2009년부터 재래닭 축산화에 도전
이씨는 양계장을 시작하기 전 과수원 부지였을 때 사용됐던 DDT가 남아 식물과 닭들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번도 살충제와 농약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과거에 ‘농약’과 악연이 있었다. 이씨는 1982년 영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는데 참 못지었어요. 자전거도 못 타시는 선비였거든. ‘나는 농사를 잘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축산학과에 갔는데 졸업하고 소 키운다고 하니 아버지가 밥상 엎으려 했죠.” 그는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집에서 농약 치는 일을 돕다 경운기에 손가락 2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땅과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여전히 뭉툭하니 짧았다.
취업을 했지만 땅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는 중국 농업 개발에 참여했다. 고려합섬에 이직해 연해주 출신인 장치억 회장이 역점을 둔 러시아 농장 개발업무를 맡았다. 해외의 농업분야 일을 하면서 점점 시각이 달라졌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농업에 경쟁력이 없다고 그러는데, 중국과 러시아 농업을 보면서 땅이 넓은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농업은 신뢰예요. 먹거리를 안전하게 생산한다는 신뢰가 있어야 해요.”
대구에 사무실을 두고 축산시설 현대화 설비를 짓는 사업을 했다. 1991년 국내 최초로 모델하우스까지 만들어 영업하며 무창돈사(windowless)를 지었다. 무창돈사란 창문이 없는 돈사를 말한다. 온도나 습도 등을 인공적으로 제어하며 돼지가 성장하기 적합한 형태로 만들어 생산성을 높인다는 시설이다. 1986년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정부는 농업 중에서도 축산분야의 대형화·설비화·기업 계열화 등을 추진했다. 세계화 시대 농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사설 도축업체를 금지해, 시장에서 ‘닭 잡는 풍경’은 불법이 됐다. 허가받은 도축업체는 거대 도매업체로 성장했다. 돈사·계사·우사 등을 확장하는 데 정부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씨의 사업도 이런 정책적 뒷받침이 있어 번창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민도 생겼다.
“돼지 10만 두씩 키워서 연간 매출 1000억원에 이르는 농장도 있어요. 그런데 돼지를 1000두씩 나누면 100가구가 잘 살겠지요. 도매유통이 독점화되면 농민이 가격을 결정할 기회가 사라지고, 소비자는 비싼 값대로 사게 됩니다. 나라는 ‘큰 놈’에게만 돈을 대주는 게 지금의 정책인데,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이몽희씨가 친환경 농장을 일구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농산물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남들이 안 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해야 했다. 농촌진흥청 축산과학원은 2008년 재래종 닭 복원에 성공했다. ‘토종닭’과는 구별된다. ‘왕추’, ‘한협3호’ 등 토종닭은 근대에 들어 대만 닭 등과 교배를 통해 고기와 알의 생산량이 많도록 개량한 것이다. 재래닭은 근대 이전부터 키우던 닭을 말한다. 재래닭 복원은 1992년부터 유전자(DNA) 연구의 일환으로 해온 일이었다. 막상 복원하고 나니 쓸 곳이 없었다. 사료는 많이 먹지만 무게는 많이 나가지 않고 번식과정도 까다로웠다. 이 재래닭의 축산화에 관심이 생겼다. “아무도 도전 안해본 것이니까요. ‘해보겠다’고 나서니까 친구들이 다 말렸습니다.”
이몽희씨의 농장 작업일지. 동별 전체 닭 산란계, 사망한 닭, 비율 등을 꼼꼼히 적어놨다.
현재 농업이 미래에 끼칠 영향 고민을
정작 농장을 시작하니 대학에서 배웠던 것이나 사업 때 알고 있던 지식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 때야 데모하러 다니느라 공부를 잘 안하기도 했지만, 당시 지식은 ‘식량증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품종 개량하고, 비료 많이 투입하고.” ‘재래닭’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이씨는 겨울이 되면 온도를 맞춰주고, 계사를 하루 두 번씩 꼬박꼬박 소독했는데 닭들은 죽어나갔다. “5~6년간 병아리들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하니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자’고 했어요. 소독도 안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겁니다.” 즉 현재 그가 농장을 운영하는 방침은 시행착오의 결과다. 처음부터 신념을 갖고 ‘친환경’, ‘동물복지’, ‘자연주의 농법’ 등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닭들이 가장 잘 클 수 있도록 방법을 찾다보니 ‘자연주의 농법’에 가까운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살충제 계란’ 사태로 친환경 농장에 대한 불신이 높다. 더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씨의 경우 모든 생산과정을 ‘자연적’인 것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현대 축산과학도 적극 활용한다. 병아리 때 생후 30일 안에 3회 백신을 맞힌다. 산란계는 평생 15~16회 맞힌다. 기생충에 감염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구충제를 타서 사료에 섞어 주고, 전염병이 돌 법하면 비타민 등까지 타 먹인다. 사료를 닭장 문 밖의 공급장치에 넣어두면 자동으로 닭장 안의 모이바구니와 음수대로 전달된다. 매일 10개 동의 닭 사폐율과 건강상태를 체크해 기록하고, 사료회사와 공유하며 데이터로 만든다. 기준을 맞추려 하기보다 자발적으로 이런저런 실험할 여유가 있는 게 노하우를 만드는 데 중요했다.
“병을 예방하는 차원의 항생제를 안 쓰는 대신 저만의 노하우는 생겼습니다. 전체 닭들의 0.025%가 죽으면 조심 단계고, 0.05%가 죽으면 병이 돌고 있다는 거죠. 병이 돌면 영천농업기술센터에 가서 천연항생제, 효소액 등을 타 먹입니다. 다른 데 의존 안 하려는 건 면역체계입니다. 햇볕을 많이 쬐고 병을 이겨내게 해서 면역체계만큼은 스스로 만들게 해야 해요.”
닭과 계란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고나니 유통이 문제였다. 풀무원과 교섭을 했지만 가격조건이 맞지 않아 결렬됐다. 다행히 ‘한살림’이 재래닭 브랜드화에 관심을 보여 빠르게 계약했다. 납품가는 한 알당 540원, 소비자가는 750원이다. 주급으로 지불된다. 사료값을 제하고 연 매출이 8000만원은 나와야 농가에서도 4인 가족이 충분히 먹고 산다는 것이 지론이다. 생산자가 충분히 좋은 먹거리를 안정된 환경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안정적 판로를 확보해주는 것이 ‘협동조합’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재래종 닭이 영양이나 맛 차원에서 특별히 우수하지는 않다고 했다. “모성애가 강하다고 할까요? 알을 품는 힘이 강해요.” 이 특징을 값어치로 쳐줄 것인지는 소비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이씨는 이날 일지에 ‘마지막 기록일’이라고 적었다. 개인의 관심과 신념을 바탕으로 자본, 학력, 지식, 경험, 인맥 등을 총 동원한 3150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친환경 농장이 됐으나 DDT 한 방에 모든 성취가 사라졌다. ‘역사’는 현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거꾸로 지금의 농업이 후손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역사가 될지 고민하는 일이 남겨졌다. 폐업 농장주가 될 이씨는 무엇을 고민하는지 물었다.
“다음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일단 이 농장을 잘 정리해야죠. 닭들은 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다 살처분하고. 나무들 베어내고, 시설까지 완전히 정리하는 작업을 8월 말까지 할 계획입니다. 양계업은 언젠가 다시 할 겁니다. 농업에서도 부가 한 쪽에 몰리지 않는 방식을 찾고 싶거든요. 이 땅은 공장이나 창고부지 아니면 쓸 데가 없어요. 저는 손해가 막심한데…. 정부가 나서서 환경재앙 교육장으로 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이 기회에 전국 토양의 농약오염 실태를 완전하게 점검했으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겠지요. 뜨거운 감자니까. 하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