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자연의 시간과 정치적인 인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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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연의 시간과 정치적인 인간의 시간

입력 2017.08.14 15:48

시간은 우주의 운행 이치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해석되고 전달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시간이라는 제도는 일정한 시공간을 차지하고 사는 인간이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8월 15일, 북한 정부는 기존의 동경(東經) 135도 표준시를 버리고 그보다 30분 늦은 ‘평양표준시’를 채택한다고 발표했다. 한국과 일본의 시계로 8월 15일 0시30분, 평양의 시계는 30분을 되감아 자정으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북한은 한국보다 30분 늦은 시간대를 쓰고 있다.

세계의 표준시간대는 대부분 정시 단위로 구분되어 있다. 대양에 외따로 떨어진 작은 섬들이 30분 차이 나는 시간대를 쓰기도 하지만, 구태여 30분 또는 45분 차이로 시간대를 나누는 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선택이다. 여러 이웃 나라들과 국경선을 맞대고 지내면서도 자기 나라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크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등은 인접국과 30분 차이 나는 시간대를 고수하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 사이에 낀 네팔은 인도와 15분 차이 나는 시간대(GMT+5:45)를 사용하기도 한다.

한반도는 그리니치표준시(Greenwich Mean Time)보다 9시간 빠른(GMT+9) 시간대와 8시간 빠른(GMT+8) 시간대의 거의 중간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국제 관례를 따르자면 두 시간대 중 하나를 골라 표준시간대로 삼으면 된다. 남한은 일본이 채택한 GMT+9 시간대를 선택했고, 북한도 2015년 8월 14일까지는 그렇게 했다. 굳이 30분 차이를 두어 봐야 남북교류 등에 불편만 늘어날 텐데, 북한은 왜 갑자기 ‘평양표준시’를 선포한 것일까?

전 세계 경도의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 그리니치가 세계 경도의 기준이 될 ‘자연적’이거나 ‘과학적’인 이유는 사실 없다. / 위키미디어 공동이미지

전 세계 경도의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 그리니치가 세계 경도의 기준이 될 ‘자연적’이거나 ‘과학적’인 이유는 사실 없다. / 위키미디어 공동이미지

시간을 정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

북한당국은 평양표준시를 선포하면서 “일제의 100년 죄악을 결산하고 일제식민지 통치의 잔재를 흔적도 없이 청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이들이 새로 정한 동경 127.5도 표준시는 실은 1908년 대한제국이 채택한 표준시이기도 했다. 동경 120도 표준시는 중국의 시간대였고, 동경 135도 표준시는 일본의 시간대였으므로 두 큰 나라 사이에서 독립을 지향하던 대한제국은 둘 중 하나를 택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시간대를 선포한 것이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고 대한제국이 사라지면서 1912년 조선총독부 고시에 따라 한반도의 시간대도 일본과 통합되었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는 이것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한국전쟁 중에는 주일미군과 합동작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대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휴전협정 체결 후 1954년 3월 21일부터 대통령령 876호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서울표준시를 선포하였다.

하지만 식민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는 현실과 여러 곳에서 부딪쳤다. 무엇보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친 남한은 미국의 세력권 안에서 일본과 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30분이라는 애매한 시차는 일본과의 무역이나 통신에도 걸림돌이 되었고, 주일 미공군과 사실상 보조를 같이했던 한국 공군의 작전에도 큰 불편을 끼쳤다.

1954년 제15차 국무회의 자료 ‘표준시간 복구 문제에 관한 이유서’에 첨부된 시간대 지도. /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4195

1954년 제15차 국무회의 자료 ‘표준시간 복구 문제에 관한 이유서’에 첨부된 시간대 지도. /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BA0084195

이에 따라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공군이 표준시간대를 동경 135도 기준으로 복원할 것을 발의했고 국방부가 이를 국무회의에 제안하여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61년 5·16 쿠데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에 따라 ‘표준자오선 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676호)이 제정되었고, 8월 10일부터 한국은 다시 일본과 같은 표준시를 쓰게 되었다.

노파심에 짚고 넘어가자면, 일본이 국제적 로비를 벌이거나 해서 동경 135도 표준시가 일본을 지나게 된 것은 아니다. 지구는 동경 180도, 서경 180도, 합쳐서 360도이니 그것을 24시간으로 나누면 경도 15도 차이가 날 때마다 한 시간의 시차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정시 단위로 시간대를 나누면 그 경도는 15의 배수가 되고, 한반도에 가까운 경계선은 동경 120도(중국 산둥반도 부근) 아니면 동경 135도(일본 효고현 아카시시)가 되는 것이다. 한국이 국력이 약해서 정시에 떨어지는 시간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에서 읽는 위도, 인간이 긋는 경도

하지만 “어째서 한반도는 동경 120여도에 걸쳐 있는가?”라는 질문은 흥미로운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실 경도는 결국 인간이 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도는 지구의 적도와 남북극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인간이 임의로 기준을 정할 필요가 없다. 남북 방향으로 지구의 ‘가운데’는 누가 봐도 적도인 것이다. 이에 비해 경도의 기준, 즉 동서 방향으로 지구의 ‘가운데’는 자명하지 않다. 사실 어디에 금을 긋고 ‘경도 0도’로 선언한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는 자기네 문명의 중심을 기준으로 경도를 측정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간이 느끼는 세계가 급속도로 좁아지면서, 경도에 대해서도 보편적인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이것은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와 프랑스의 파리 천문대가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결국 1884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경도 회의’에서 표결을 통해 그리니치가 세계의 경도 기준 자리를 공인받았다. 오늘날에도 그리니치를 찾는 이들은 세계의 시간의 기준이 되는 ‘경도 0도’를 가리키는 표지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은 우주의 운행 이치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해석되고 전달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시간이라는 제도는 일정한 시공간을 차지하고 사는 인간이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약속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도 인간이 세계와 맺은 다른 약속들과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평양표준시가 효율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외부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그것이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에 따른 불편을 줄여 나가는 길을 찾아보는 편이 여러 모로 낫지 않을까?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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