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흥남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흥남은 일본 재벌의 수탈을 위해 태어났던 도시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북한 인민이 지켜내고 복구한 산업도시로 포장될 수 있었다.
1961년 5월 6일 흥남비료공장의 기존 설비를 활용해 지은 2.8 비날론 공장 기공식에서 김일성이 테이프를 끊고 있다. 북한은 일본과 미국의 파괴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흥남의 공장을 ‘우리 것’으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28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은 첫 공식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았다. 미군은 1950년 겨울 극심한 추위 속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이들은 스스로 장진에서 살아남은 소수, 즉 ‘초신 퓨(the Chosin Few)’라고 부르며 생사를 함께 한 기억을 간직하였다. 문 대통령은 흥남철수작전으로 아버지가 월남한 자신의 개인사를 여기에 결부시킴으로써 방미의 첫걸음부터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 필자 제공
‘삼수’의 물길을 돌려 만든 발전소
여기서 ‘초신’이란 ‘장진’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군이 38선 이북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일제가 만든 지도를 활용하다 보니 한자 지명의 일본식 발음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 때문에 초신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초신 퓨’는 영어로 ‘선택된 소수’를 뜻하는 ‘초즌 퓨(the chosen few)’에 빗대어 만든 말이기도 하다. 이 ‘초즌 퓨’라는 표현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성서>의 마태복음 22장 14절,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For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에서 비롯된다. 발음도 거의 같은 데다 고난을 이겨낸 참전군인들의 자부심에도 들어맞는 고급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진이건 초신이건, 이 지명이 중요해진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 장진호는 사실 1934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개마고원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는 부전강·장진강·허천강의 삼수(삼수갑산의 그 삼수다)를 가로막아 물길을 돌리며 생겨난 인공호수 중 하나가 장진호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비료재벌 노구치 시타가우(1873∼1944)는 암모니아 합성의 원가를 좌우하는 전기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발전소를 새로 짓기로 하고, 토목공학자 구보타 유타카(1890∼1986)에게 공사를 맡겼다. 구보타는 삼수의 상류에 댐을 쌓아 물줄기를 경사가 급한 동해안 쪽으로 돌리는 유역변경식 발전을 시도하였다. 이 대담한 시도는 1932년부터 결실을 거두어 부전강·장진강·허천강 유역에 대규모의 수력발전소들이 속속 건설됐다.
당시 ‘동양 제일의 대규모 공사’로 주목을 받았던 이 거대 토목공사는 수천 명의 한국인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세간에서는 “노구치는 사람 몸뚱이로 댐을 구축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발전소와 한 묶음으로 건설된 흥남의 비료공장도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로 악명이 높았고, 일제강점기 노동자 투쟁의 최전선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광복 후 16년이 지난 1961년, 흥남비료공장의 기존 설비를 활용하여 ‘2·8 비날론 공장’이 신설되었을 때의 기록에는 이와 같은 착취와 저항의 기억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과 미국의 파괴행위를 강조함으로써 북한은 흥남의 공장을 ‘우리 것’으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었다. 패전 직후 일본인 고급 기술자들이 소련군이 진주하기에 앞서 군수용 항공연료의 생산설비 등을 파괴한 일이 있었고, 한국전쟁 중 미군은 흥남의 공장들에 네 차례에 걸쳐 약 1600톤에 이르는 폭탄을 쏟아부었으며, 흥남철수작전을 완료하면서 함포사격으로 흥남항을 완파하였다.
기술의 역사적 의미란 계속 바뀌는 것
이것은 북한 정부에는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흥남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과 미국이 행한 파괴를 강조하고, 그에 맞서 싸우거나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분투한 북한 인민의 영웅적 위업을 유난히 강조함으로써 흥남은 일본 재벌의 수탈을 위해 태어났던 도시라는 과거에서 벗어나 북한 인민이 지켜내고 복구한 산업도시로 포장될 수 있었다.
흥남에서 새롭게 생산하는 합성섬유 ‘비날론’은 이와 같은 재생의 서사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물건이었다. 비날론은 일제강점기 한반도 출신 최고의 과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리승기(1905∼1996)가 1939년 교토제국대학에서 개발했으며, 흡습성이 높아 한민족에게 친숙한 면을 대체할 수 있었고, 한반도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석과 석탄을 원재료로 이용하여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 덕에 비날론은 ‘과학영역에서 주체를 세운’ 모범사례로 일컬어졌고, 비날론의 생산기지인 흥남은 주체과학의 전당으로 그 위상을 다질 수 있었다.
북한에서 비날론의 의미는 오늘날까지도 각별하다. 김일성 사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극심한 전력난으로 흥남의 비날론공장도 가동을 멈추었다. 만 16년 동안 멈춰 있던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설비 보강을 마치고 다시 움직인 것은 2010년 3월이었다. 당시 오랜 칩거로 와병설을 넘어 신변이상설이 돌던 김정일은 공장 준공을 축하하는 군중대회에 예고 없이 등장하여 자신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는 이후 김정은과 함께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다시 찾음으로써 김정은이 후계자임을 만방에 확실히 하였다.
김정일이 칩거를 깨는 자리로 비날론 공장 준공 기념식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날론은 북한의 과학기술계가 성과를 쏟아내며 순조로운 산업화의 길을 걷던 1960년대를 상징하고, 이 공장이 다시 움직인다는 것은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좋았던 시절이 다시 오리라는 희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의 기술을 계승하면 그 의미도 계승할 수 있는 것일까? 기술의 역사적 의미란 사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주체섬유’라는 비날론의 별칭도 1961년 북한 안팎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기술적 요소들의 상호작용 안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비날론이라는 사물을 매개 삼아 3대를 연결하려는 북한의 시도는 그 점을 외면하고 있기에 불안해 보인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