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진(1966~ )
저울이 버려져 있다
무게만큼의 숫자가 나오는 부분이 떨어져나간 채
수평을 잃은 발판에 조금씩 녹이 자라고 있다
더 이상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
자신 위에 놓인 많은 질문들에게 답을 주었을 저울
저울이 정의 내린 숫자들이 세상에서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으로 저울이 저울다울 수 있었을 때
그렇게 아름다웠던 저울은 지금
아파트 뒷길에서 하늘을 재며 녹슬고 있다
나는 가만히 버려진 저울 위에 올라가 앉아본다
잠시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 세상에 앉아본다.
감자를 캐어 저울에 올려놓았다. 무게가 과연 정확할까. 햇볕과 바람과 키우는 이의 손길 무게도 쟀을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재지 못하는 저울은 ‘버려져’ ‘더 이상 무게를 말하지 못하는 저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