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호(1962~ )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 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이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냉장고를 친구한테 줘버린 사람이 있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시끄럽고 냉장고 안에 음식이 쌓이는 것도 싫더란다. 냉동·냉장식품은 동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전기요금까지 내며 잘 보관해 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한두 끼니 분량만 사니 늘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도 했다. ‘냉장고는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는 버려져서도 피곤하다.
<김시언 시인 2013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도끼발>(2015)이 있음.>